한 시중은행에서 디지털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 A씨는 지난해 디지털 조직 개편안을 고민하다 생각지 못한 장애물에 부딪혔다.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상품기획·예산·마케팅 등 은행의 현업 부서와 정보기술(IT) 조직의 일부를 떼어내 같은 공간에서 협업할 수 있도록 분리된 새 조직을 꾸리려던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이미 IT기업이나 스타트업 등은 오래전부터 도입해 운영 중인 ‘애자일 조직’과도 유사한 형태다. 하지만 ‘조직도상으로 IT부서가 이용자부서로부터 독립돼 있어야 한다’는 금융감독원의 IT 검사 매뉴얼 항목으로 제동이 걸렸다. 이 검사는 은행·증권·보험사는 물론 자산 2조원 이상의 카드·저축은행 등이 모두 대상이다.
A씨가 “단편적으로 조직 분리를 강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규제”라고 호소하자 금융당국은 이에 공감하면서도 규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A씨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금융서비스를 빠르게 구현하려면 현업과 IT 기획·개발조직이 동시에 협업하는 게 필수인데 은행은 이마저 쉽지 않다”며 “‘빅테크’에 대항해 뼈를 깎는 쇄신이 시급한데 각종 규제에 발이 묶여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에 대응해 ‘동일기능 동일규제’와 ‘규제 상향 평준화’를 원칙으로 디지털 금융 혁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금융권에서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불만이 크다. 금융사들은 마이데이터·종합지급결제사업자 등 신사업과 관련한 역차별 논란뿐 아니라 수십년간 짜여온 낡은 규제체계와 금융당국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규제가 공정경쟁을 막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구시대 규제의 표본으로 꼽혔던 망분리 규제를 손보고 기본적인 대출비교 서비스도 불가능하게 했던 ‘1사 전속주의’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게 금융사들의 중론이다. 금융사들이 아무리 혁신 노력을 기울여도 대대적인 금융규제 개편이 병행되지 않으면 빅테크의 금융시장 잠식에 대항할 수 없다는 얘기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의 사례만 봐도 빅테크가 금융권에 미치는 파급력은 상당하다”며 “빅테크가 규제를 피해 금융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는 상황을 막을 수 없다면 기존 금융사들이 동일 경쟁할 수 있도록 낡은 규제를 타파해 같은 조건의 문을 동시에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 IT부서 결합·토지신탁 업무 제한...“빅테크에 기울어진 운동장”
“국내 은행들은 수십 년 간 전족을 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은행업을 하는 대가로 각종 규제를 감수하고 발을 묶어뒀는데 은행의 기능을 빅테크에 나눠주면서 은행에는 전족을 한 상태로 뛰라니 ‘공정경쟁’이 되겠습니까.”
기존 금융사와 빅테크 간 역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규제가 상향 평준화돼야 한다는 목소리에 대해 한 시중은행의 임원 B씨는 “현재로서는 궁색한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앞서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5대 금융지주 회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네이버·카카오 등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에 대해 “‘(전체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하향 평준화보다 (규제를 함께 푸는) 상향 평준화가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동의한다”며 “한쪽을 못하게 하는 것보단 (규제를) 풀어주는 방향이 좋다”고 했다. 금융당국이 금융사의 외부 협업을 원천봉쇄하는 망분리와 기본적인 대출 비교 서비스도 불허하는 ‘1사 전속주의’ 규제 완화를 검토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B씨는 “은행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규제와 각종 그림자 규제에 맞추느라 엄청난 인력과 시간을 쏟고 있다”며 “망분리와 같은 굵직한 규제를 풀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금융현장 곳곳에 녹아 있는 시대착오적인 규제 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기존 금융사들은 네이버와 경쟁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법적근거 없는 행정지도 등 시대착오적 규제 눈덩이 |
대표적인 사례가 겸영 신탁회사의 토지신탁 업무를 제한한 것이다. 2009년 시행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은행·보험·증권사도 부동산신탁업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은행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지신탁 업무를 할 수 없다. 금융당국이 그 해 구두로 겸영 신탁사의 토지신탁 취급을 제한한다는 행정지도를 내린 뒤 올해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은행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법에서 허용한 업무를 법적 근거 없는 행정지도로 제한하고 있는 셈”이라며 “필요한 규제라면 취지에 따라 법을 개정하고 예측 가능하게 운영해야 하는데 이런 원칙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금융당국의 관리를 받지 않는 빅테크들은 이런 숨은 규제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강조했다.
'동일기능 동일규제' 체계부터 바꿔야 |
전문가들은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은 물론 금융업과 비금융업의 융합이 가속화하는 흐름에 발맞춰 법규제 체계도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제·수신·판매 등 금융업이 기능별로 쪼개지고 사업자가 세부 기능을 재결합해 새로운 사업모델을 만드는 상황에서 금융규제의 단위를 기능별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업종별로 규정된 현 체계대로는 금융상품의 판매 채널만 하는 빅테크를 규율할 마땅한 장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정순섭 서울대 교수는 “현행 상품·기관별 규제로는 기술 발전에 따른 새로운 금융 상품이나 서비스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기능을 중심으로 일반법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뼈 깎는 구조조정해야" 자성도 |
/빈난새기자 bint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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