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윤 일병 사건 아시죠? 혹시 부검 자료들을 2시간 내로 검토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 2014년 8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2시. 서울대병원의 법의학 교수 연구실로 한 기자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군부대에서 선임들의 폭행으로 냉동식품을 먹다 질식사한 윤모 일병의 사건을 다시 살펴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e메일로 수많은 사진 자료를 받아본 법의학 교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질식사’라는 최초 사인과 달리 교통사고 피해자에게나 볼 수 있을 법하게 갈비뼈가 심하게 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부검 경험으로 질식사가 아닌 반복적 폭행에 의한 쇼크사가 사망원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심한 구타가 특정 부분에 가해지면 이게 맞아 죽었다고 하거든요. 부교감신경이 자극되면서 심장이 멈춘 것 같습니다.”
법의학 교수의 발언은 당일 밤 뉴스를 통해 전해졌고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상해치사로 가해자들을 기소하고 “공소장 변경은 없다”고 버티던 군은 당연히 발칵 뒤집어졌다. 부리나케 연구실로 찾아온 군 검찰에게 법의학 교수는 조목조목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결국 군은 입장을 바꿨고 가해자들에게 살인죄가 적용돼 주범은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 단순 상해치사로 묻힐 뻔한 부대 내 폭행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주인공은 바로 국내 최고의 법의학자로 꼽히는 유성호(48)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다.
그 일이 발생한 지 꼭 6년째인 올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연구관에서 그와 만났다. 시큼한 약품 냄새가 나는 듯한 3층 복도에서 만난 유 교수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새치가 희끗희끗 보이는 가르마 머리에 둥근 뿔테 안경, 그 너머로 보이는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와 단정한 정장 차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교수실 한쪽 벽면에는 법의학서적들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벽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유 교수는 윤 일병 사건 외에 사인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변사사건들에 대한 명쾌한 해석으로 잘 알려진 ‘스타 법의학자’다. 그는 20년 넘게 자신의 손으로 2,000구가 넘는 시신을 부검한 법의학의 권위자다. 최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법의학은 시신을 부검하고 첨단과학과 연구기술을 통해 사망의 정확한 원인과 종류를 파악하는 학문이다. 유 교수는 법의학자를 범죄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과 검찰에 과학적·의학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조력자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법의학자는 법률에 관계된 의학적인 일을 하는 직업이에요. 매주 시신을 부검해 경찰·검찰의 수사자료에 기본적인 판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법의학자가 직접 사건 해결에도 나서지만 원래 수사는 경찰과 검찰이 하는 겁니다. 법의학자는 어디까지나 그들을 도와주는 직업이죠. 검경이 수사한 자료에 의학적·과학적 숟가락을 얹어주는 사람이 법의학자입니다.”
법의학자는 수많은 죽음을 다루는 직업이다. 변사는 물론 의료사고나 재해사고 등 사인을 명확히 밝혀야 하는 모든 형태의 죽음을 마주하며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서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법의학자는 과학적 분석도구를 활용해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는 동시에 말 없는 망자와 공감하고 대화하며 한(恨)을 풀어줘야 한다. 아무 말이 없는 ‘사자(死者)의 대변인’이 돼야 하는 셈이다.
“2015년 1월 의정부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난 적이 있었어요. 필로티 기둥 구조라 불은 큰 화재로 이어졌죠. 현장에서 발견된 피해자 가운데는 어려서부터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라오다 입양과 파양을 두 번이나 겪었던 미혼모와 다섯살배기 아기가 있었어요. 아기를 꼭 끌어안고 있던 엄마 덕분에 아기는 화상을 하나도 입지 않았죠. 대신 심한 화상을 입은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하다 세상을 뜨셨어요. 그런데 엄마의 눈가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보이는 거예요. 아마도 눈 감기 전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게 아닌가 싶어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울고 경찰관들도 같이 울었죠.”
지금은 다들 법의학자를 유 교수의 천직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가 처음부터 법의학자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창시절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손꼽히는 모범생이었다.
“저는 원래 이과보다 문과에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이과를 선택했어요. 부모님이 형편이 넉넉지 못한 시골 출신인데다 공부하러 읍에 나가면 다들 부잣집 자제는 의사 집안이더라고요. 또 어릴 적 파스퇴르 전기를 읽었는데 백신을 개발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 같아요. 그랬지만 마음속에는 인권과 정의가 계속 남아 있었죠.”
그렇게 서울대 의학과에 입학한 유 교수는 본과 4학년 시절 국가고시를 앞두고 만난 이윤성 교수로부터 법의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뒤 마음속에 있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사실 저도 법의학이 뭔지 잘 모르고 이 분야에 들어왔어요. 의사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정신과의사나 외과의사를 생각했죠. 그러다가 본과 4학년에 국가고시 마지막을 앞두고 이윤성 교수님의 법의학 과목을 들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당시 이 교수님은 ‘법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제자가 10년째 없어 걱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가’ 했어요. 그 순간 교수님과 딱 눈이 마주쳤죠. 물론 교수님과 눈을 마주쳤다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어요. 당시 190명이 들었던 수업이었으니까. 어쨌든 교수님은 ‘앞으로 법의학은 전망이 밝다. 치고 올라갈 일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법의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교수님이 몇십년 만에 다시 받은 제자라 하더라고요.”
유 교수는 지금도 자신의 은사인 이 교수와 꾸준히 연락하며 많은 걸을 배우고 있다. 이 교수는 퇴임 이후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원장과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갈수록 법의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국내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현재 대한법의학회에 등록된 부검 가능한 법의학자 수는 전국적으로 59명밖에 되지 않는다. 유 교수는 “저도 법의학을 선택한 지 20년 만에 처음 제자가 생겼는데 전공의(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1명이 전부”라며 “5~6년 전 제 수업을 듣던 사회과학대 수석 출신 심리학과 학생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법의학을 하겠다고 해서 많이 격려했지만 결국 다른 분야를 선택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의학 전공을 택하지 않는 학생들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다.
“의대생들이 법의학 분야를 선택하기 어려운 것은 다른 동기들과 달리 졸업 후 사실상 새로운 분야에 다시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법의학자는 임상의사보다 월급은 적은 반면 고생은 더 많이 해요. 대학교수 아니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지만 5급 공무원이라고 해도 다른 의사 동료들보다 월급이 적죠.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어요.”
한국의 법의학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더 많은 법의학자가 양성돼야 한다는 게 유 교수의 생각이다. 그가 예능 프로그램도 가리지 않고 각종 매스컴을 통해 법의학을 ‘전파’하는 이유다.
“대개 의사는 모범생이 많은데 법의학은 아무래도 통통 튀는 사람들이 하게 되죠. 부모님들도 자식이 돈 잘 버는 피부과나 성형외과 의사 대신 법의학자를 된다고 하면 안 좋아할걸요. 저는 지식의 바다에서 조개를 하나씩 쌓아올리는 학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법의학 연구에도 매진하고 제자들도 잘 가르치고 싶어요. 법의학 교과서는 너무 딱딱해서 새로운 형식의 재밌는 교과서도 쓰고 싶고요. 법의학자는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입니다. 좋은 법의학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 이 세상의 억울한 죽음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억울한 죽음이 없는 곳’. 그가 꿈꾸는 세상이다. /방진혁기자 bready@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He is
△1972년 서울 △1998년 서울대 의학과 학사 △2002년 서울대병원 병리전문의 △2006년 서울대 법의학박사 △2006년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 △2006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촉탁 법의관 △2019년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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