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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40년 美 징병법 발효

평시 징병으로는 최초





1940년 9월16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징병법(Selective Training and Service Act)에 서명했다. 하원(찬성 263 대 반대 149)과 상원(58대31)도 무난히 통과한 징병법으로 미국은 약 100만명의 병력을 뽑았다. 미국의 징병제는 남북전쟁과 1차 세계대전 때도 시행됐으나 전쟁 상태가 아닌 평시 징병은 사상 최초. 당시까지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으나 최소한의 준비는 갖춰야 한다는 명분으로 징병법에 힘이 실렸다.

미군은 실제로 약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400만명이 넘던 병력은 30만명을 밑돌았다. 소총이 부족해 목총으로 훈련받는 신병도 많았다. 전차 80대가 고작인데다 탄약 비축분도 거의 없었다. 대책이 시급했음에도 징병제에 반대가 적지 않았던 것은 특유의 고립주의와 군대에 대한 반감 때문.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횡포에 시달린데다 직업군대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다.

평시 징병법은 이런 이유에서 세 가지 제한 규정을 달았다. 첫째, 복무지역을 서반구로 한정했다. 유럽 파병을 법으로 봉쇄한 셈이다. 둘째, 복무기간을 12개월로 묶었다. 셋째, 징집 대상도 적었다. 21~36세 남성 중에서 제비뽑기로 입대자를 골랐다. 미군 지휘부가 갖고 있던 제한적 징병제에 대한 불만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풀렸다. 일본·독일과 싸우기 위해 훨씬 강해진 징병제가 시행된 것이다. 징집 대상 상한도 45세를 거쳐 65세까지 올라갔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 병력은 1,640만명 선까지 이르렀다.



종전과 함께 자동 폐기됐던 징병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두 차례 부활했다가 1975년 사라졌다. 공화당 후보로는 이례적으로 ‘징병제 폐지’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서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인 1980년 징병등록제를 마련했으나 실제 징병은 시행되지 않았다. 징병등록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18~25세 남자가 징병관리청에 ‘적령자’로 등록하지 않을 경우 공직 진출과 학비 보조, 취업에 불이익이 뒤따른다.

징병제가 시행되던 시절, 미국의 프로스포츠·연예계의 슈퍼스타들은 군 복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박수를 받았다. 다승왕을 목전에 두고 입대한 메이저리그 투수도 있다. 세계적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독일에서 군 생활을 보냈다. 유난히 병역기피자가 많았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사실상 패배하며 발을 뺐다. 우리의 징병제는 건강할까. 힘 있는 집안일수록 병역기피가 많다는 인식은 언제쯤이나 없어질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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