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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를 살아남은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과 삶

[책꽂이]살아남은 그림들

■조상인 지음, 눌와 펴냄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부터

기하학적 추상 거장 이승조까지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지켜낸

근현대 화가 37명 작품·삶 담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나혜석(1896~1948)은 일찍이 일본 유학을 통해 미술을 배운 화가인 동시에 글 잘 쓰는 문인이었고 여성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 내는 ‘신여성’이었다. 3·1 운동의 확산을 도모하다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나 당시 변론을 맡았던 김우영과 화려하게 결혼했다. 그 시절 남편과 세계일주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떠들썩했지만 정조관념도 남녀평등이 필요하다며 신문에 발표한 ‘이혼 고백서’로 더욱 유명하다. 자신을 불륜으로 이끌어 이혼의 빌미를 만든 최린에게 거액의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실제로 위자료 일부를 받기도 했다. 100년이 지난 요즘 사람이 보기에도 가히 ‘파격 인생’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화려한 꽃 같던 인생은 급속도로 시들기 시작했다. 결혼생활이 한창이던 1928년 무렵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 속 나혜석은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자신의 훗날을 예견한 듯 어둡고 묵직하다. 이혼 후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 나혜석은 자식들과 헤어져 사찰을 전전하며 살았다. 1938년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해인사의 풍광’을 마지막으로 행적이 묘연해진 그는 10년 뒤 서울의 한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작가의 삶 만큼이나 작품의 운명도 기구했다. 생전에 발표한 그림이 300점 이상이지만, 집에 화재가 나면서 작품들이 왕창 불탔다. 사후에는 그림을 보관하던 오빠 집이 북한군에 점령돼 그림들이 뭉텅이로 없어지는 바람에 오늘날 전하는 나혜석의 ‘살아남은 그림들’은 몇십 점에 불과하다.

나혜석 ‘자화상’ /사진제공=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신간 ‘살아남은 그림들’은 조선 말부터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변의 시대를 화가로서 살아남으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지켜낸 근현대화가 37명의 작품과 삶을 다룬다. 김환기·이중섭·박수근·윤형근부터 이상범·변관식·이응노를 비롯해 남관·이쾌대·배운성·이인성·오지호·곽인식·권옥연·변시지 등 근대 거장과 지금도 활동 중인 서세옥·김종학·김창열·박서보·이우환까지 아우른다. 요절한 손상기와 최욱경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서울경제에서 13년째 미술 분야를 취재해 온 기자로, 지난 2017년부터 100회에 걸쳐 지면에 연재했던 ‘조상인의 예(藝)’를 기반으로 이 책을 엮었다.

화가 구본웅은 일제의 강제 명령으로 쫓겨가듯 이사한 수원 집에 그림을 옮겨뒀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집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친구의 초상’은 구본웅과 절친했던 시인 이상을 그린 작품으로, 번뜩이는 붉은 눈매와 파이프 문 입술에서 예술가의 야심과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낸다. “아마도 한국인 최초의 완전추상을 이뤘을” 유영국의 초기작은 일본 유학 후 태평양전쟁의 기운이 짙어져 작가가 급히 귀국하는 바람에 소실됐고, 서울에서의 작업들 역시 한국전쟁 이후 상당수 사라졌다.



화가들은 하나같이 절박했다. 윤중식(1913~2012)은 전쟁통에 고향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며 아내·큰 딸과 생이별했다. 아들 손을 잡고 작은딸을 업은 채 부산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그는 종이를 구해 밤마다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 큰 그림으로 다시 완성할 것이라는 다짐이 적힌 피난길의 스케치북이 이 책의 집필 과정에서 처음 발굴됐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오는 11월까지 개최하는 특별기획전 ‘낯선 전쟁’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빠른 손놀림의 연필 자국과 붓질은 화가의 다급함, 시절의 긴박함과 함께 탁월한 묘사력을 드러낸다.

이승조 ‘핵’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파이프 같은 형태의 반복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이룬 이승조(1941~1990)를 소개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책을 위해 새롭게 쓴 글 중 하나다.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대규모 작가 회고전에서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의 RM이 SNS에 사진을 올리면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저자는 이승조가 생전에 남긴 작가노트와 기록들, 그와 관련한 최근 논문 등을 토대로 화가가 기차 여행 중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스쳐 지나간 인상이 파이프가 된 사연, 매끈한 화면의 비밀 등을 찾아냈다.

저자는 “근대(近代)의 예술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가깝기만 한 게 아니라 근대(根代), 즉 뿌리가 된 시대였음을 확인했다”면서 “공교롭게도 지난 세기의 위기와는 또 다른 위기의 ‘코로나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상황이라 책이 ‘정서적 면역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수록작 도판만 150점 이상인데, 책을 읽다 그림이 보고 싶어질 수 있음을 고려해 미술관 소장품을 우선적으로 택했다고 한다. 2만1,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이인성 ‘사과나무’ /사진제공=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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