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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만주 잇는 '천하제일관'...전쟁터서 산·바다 복합관광지로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8>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명나라 때 완성한 600년史 산해관

中 본토 지키는 핵심 방어선 역할

중원~만주~동몽골 교역로 활용도

2000년대 이후 성벽·시설 복원

바닷속까지 이어진 성벽 '노룡두'

낙산장성에선 발해가 손에 닿을듯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소재 산해관 앞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천하제일관’이라는 이름과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는 상징성에 산해관은 인기 관광지가 됐다.




중국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산해관(山海關·산하이관)은 지형부터 독특하다. 산해관은 행정구역상으로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산하이관구에 위치한다. 수도 베이징에서 정동쪽으로 약 300㎞ 지점이다. 산해관이 있어 행정구역 산하이관구가 됐을 것이다.

중국의 원래 중심은 중원이고 중원의 북부는 산악지형인데 이 산들이 남쪽 농경지역과 북쪽 유목지역을 가르고 있다. 산맥은 동쪽으로 달려 ‘각산(角山)’이라는 곳을 종점으로 발해만(渤海灣·보하이만) 가까이에 와서 뚝 끊긴다. 각산과 발해만 사이에 너비 10㎞ 정도의 평지가 있다. 중원과 만주·동몽골 간의 교역로 가운데 이 지역이 가장 편리한 길이었다. 거꾸로 적으로 돌변한 상대가 침입할 최적의 조건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역대 중국 왕조는 산과 바다가 만나는 좁은 이 지역에 방어용이자 공격을 위한 보급 기지인 관성(關城)을 쌓았다. 관성은 장성의 관문이자 그 자체로 네모꼴의 성곽을 말한다. 이 지역에 가장 견고한 성곽을 완성한 시대는 명나라 때다. 명나라는 산맥을 따라 북부 국경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결해 만리장성을 쌓고 끝부분에 산해관을 설치했다. 산해관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편액처럼 중국 제일의 웅장함을 과시한다.

산해관 지역을 넓게 보면 북쪽 각산에는 각산장성이, 평지에는 산해관 관성이 각각 있는 셈이다. 발해와 맞닿아서는 영해성(寧海城)이 있다. 바다를 건너면 바로 요동반도이고 이어서 한반도가 나온다. 산해관이라는 명칭은 이 ‘각산’과 ‘발해’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베이징에서 산해관으로는 기차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따라 고속열차는 2시간 정도 걸려 친황다오역에 도착한다. 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이동하면 산해관까지는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산해관에 가까워지면 시내를 가로지르는 성벽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만리장성이 도시를 거의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과거 도시개발 과정에서 성벽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도 했다.

좁은 의미의 산해관 관성은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을 가진 성문과 네모꼴로 이어진 성곽 지역이다. 대개 편액은 건물의 외부로 향한 정면에 붙어 있는데 천하제일관 편액은 중국 쪽인 남쪽 방향으로 붙어

산해관에서 바라본 각산장성 모습. 성벽이 산을 타고 구불구불 오르고 있다.


있는 것도 독특하다. 지난 2000년대 이후 성벽과 시설들이 복원돼 제법 북적거린다.

만리장성 성벽이 최종적으로 끝나는 영해성에서 성벽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곳이 이른바 ‘노룡두(老龍頭)’다. 만리장성 전체를 한 마리의 용으로 봤을 때 머리 부분이라는 의미다. 유목민족의 기병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바다에까지 성벽을 연결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산해관을 찾는 여행객들은 중국 여행에서 쉽지 않은 산과 바다의 복합 문화관광을 할 수 있다. 산해관은 명나라 초기에 완성돼 6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이다. 산을 오르고 싶으면 차로 10여분 거리인 낙산장성으로 가면 된다. 낙산 능선을 따라 올라간 정상에서는 발해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직접 손으로 바닷물을 만지고 싶으면 영해성으로 가면 된다. 성 밖 해안가에 있는 모래밭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중국 만리장성에 있는 여러 관성 가운데 산해관은 한국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거의 모두가 육로로 이동했는데 필연적으로 산해관을 거쳤다.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평야를 횡단한 후에 이곳 산해관에 들어서는 순간 진짜 ‘중국’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거꾸로 귀국하는 경우에도 산해관을 지났을 경우 중국을 떠난 셈이 된다.

중국의 입장에서 산해관은 중국 본토를 지키기 위한 핵심 방어선이었다. 이는 인적·물적 교류에 커다란 장애가 되기도 했다. 1780년 중국을 방문한 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에서 “(명나라) 서달이 이 관(산해관)을 쌓아 오랑캐를 막고자 했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적(청나라)을 맞아들였지. 천하가 평온할 때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의 비웃음만 사고 있을 뿐이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산해관이 역사에 이름을 깊이 새긴 것은 중국의 운명을 바꾼 전쟁터가 된 명·청 교체기 때다. 만주에서 만주족의 청나라가 강성해졌는데 한족의 명나라와 산해관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오히려 명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멸망한다.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으로 명의 마지막 황제가 자살한 상황에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는 청에 항복하고 말았다. 1644년 청의 군대는 적의 인도로 산해관을 무혈입성하게 된다.

중국 만리장성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노룡두’가 있다.


한때 중국의 운명을 갈랐던 산해관이 역사에서 소외된 것은 시대 변화 때문이다. 서양세력이 흥기하면서 중국의 대외 주요 교역로는 남동부 지방으로 이동했다. 결국 19세기부터 산해관은 방치되고 성벽은 훼손된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까지 거치면서 원래 성벽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1980년대 이른바 ‘개혁개방’ 이후에야 문화유산 관리에 눈을 뜨고 복원에 나섰다.

/글·사진(친황다오)=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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