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1월 27일, 경성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서울시교육청 종로도서관으로 오늘날까지 명맥이 내려오는 경성도서관은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도서관. 평양에서 1906년 민간이 개설한 대동서관이 처음이지만 한일 병탄 직후 문을 닫았다. 부산과 대구에서 도서관이 먼저 생겼으나 설립자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에 의한 경성부 내 도서관 설립은 민족 운동가였던 윤익선(당시 48세)이 이끌었다.
보성전문학교을 졸업하고 1911년 모교 교장으로 부임한 그는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신문 사장까지 지냈다. 지하신문을 찍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살 때부터 독립과 계몽을 위해 도서관을 세워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출소(9월 20일) 직후부터 일을 서둘러 김윤식·김장환·윤양구 등과 함께 도서관 설립에 합의한 것이 11월 5일. 합의 17일 만에 장서 2만 3,000여 권과 함께 경성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빠른 시일에 민족 도서관 개관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 첫째, 시기가 무르익었다. 일제는 일본인들을 ‘독서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도 조선에서는 역사서를 태우고 민족 학습을 억압하며 도서관 운동을 짓눌러 반발을 샀다. 숨통이 트인 계기는 3·1운동.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며 설립 여건이 나아졌다. 둘째, 각계의 호응이 컸다. 천도교가 거금을 대고 조선귀족회 회장이던 김윤식마저 취운정 자리의 신식 건물을 내줬다. 민족진영은 물론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도 힘을 보탠 것이다.
이듬해 탑골공원에는 또 하나의 경성도서관이 생겼다. 대학원생 이범승이 총독부에서 건물을 불하받아 같은 이름의 민간 도서관을 세운 것. 윤익선이 독립운동가 양성의 뜻을 안고 만주로 떠나며 두 경성도서관은 하나로 합쳐져 본원과 분원 형태로 내려오다 지금은 윤익선이 세운 도서관만 종로도서관으로 남았다. ‘친일파 이범승’의 동상 철거가 논란이기는 하지만 종로도서관은 100주년을 맞았다.
도서관에는 역사의 회한이 서려 있다. 가토 가즈오 등이 공저한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의 도서관을 ‘독립된 사회 교육 기관이나 문화시설이 아닌 통치 도구로 여겼을 뿐이다. 1960년대에는 개발 논리에 밀려 상가로 바뀌거나(탑골공원 종로도서관) 도심에서 쫓겨났다(남산도서관). 민족 도서관 100주년, 인프라는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니나 수요가 줄고 있다. 경성도서관의 첫 부지였으며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논의했던 취운정 부근에는 숲 속 도서관까지 생겼건만 독서인은 찾기 어렵다. 걱정이다. 책을 안 읽고도 앞으로 100년을 기약할 수 있을지.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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