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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덕인가

[책꽂이-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와이즈베리 펴냄

노력으로 富·명예 성취는 착각

성장 환경 등 '타고난 운' 작용

능력주의만 강조땐 불평등 커져

샌델 '하면 된다' 위험성 지적

명문대 추첨 입학 대안 제시도





육상 트랙 위에 선수들이 일렬로 서 있다. ‘탕’ 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레이스 끝에 한 선수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면 관중들은 환호한다. 금메달도, 거액의 상금도 모두 1위 선수의 몫이다. 능력과 노력을 기준으로 1위가 정해졌으니 얼마나 정의롭고 공정한 게임인가. 사람들은 ‘하면 된다’의 가치를 현실에서 증명해 보인 이 선수가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는 영웅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의 심정을 한번 헤아려 보자. 1등이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면, 1등을 못한 것은 노력이 부족했던 탓일까. 죽을 힘을 다해 뛴 것은 모두 똑같다. 이들에게 노력 부족이라는 평가는 가혹하다. 게다가 알고 보니 1위 선수는 재력 있는 부모 덕에 어릴 때부터 최고급 영양 관리를 받고 세계적인 코치의 지도 하에 성장했다면? 그래도 나머지 선수들로 하여금 ‘내가 못난 탓’이라는 패배 의식에 젖게 하는 게임이 정의롭고 공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된다’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점차 커지고 있다.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해도 안되는 경우가 더 많은 불평등의 시대에 ‘각자의 재능과 노력으로 이룬 부와 명예는 오롯이 각자의 몫’이라는 능력주의(meritocracy)를 강조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이라는 지적이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AFP연합뉴스


‘정의란 무엇인가’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도 능력주의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낸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를 통해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배경이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하면 된다’만 강조하다가는 되돌리기 힘든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반목, 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강력한 경고음을 낸다.

언뜻 보기에 오늘날 능력주의 사회는 과거의 세습 사회보다 정의롭다. 부와 신분이 세습되는 게 아니라 개인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습 사회에서 부와 신분은 성취가 아니라 운이다. 가난 역시 운이다. 개인이 잘못하거나 노력을 안 해서 가난하고 미천한 게 아니다. 그저 타고난 운이 그랬을 뿐이다. 반면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성취는 곧 자랑거리다. 내가 이룬 것이기에 오롯이 내가 누릴 수 있고, 노력하지 않은 자들과는 나누지 않는 게 공정하다고 여겨지곤 한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과 비교해 자꾸 자신을 탓하게 된다. 게으른 자, 패배자라는 경멸의 시선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 엘리트 교육기관 인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교기./위키피디아


더 큰 문제는 갈수록 ‘만들어진’ 능력이 판을 친다는 점이다. 계층 이동에 성공한 부모들은 자식에게 기득권을 물려주기 위해 자식의 능력을 키우는 데 올인 한다. 1차 목표는 대학 간판 획득이다. 명문 대학 졸업장이 개인 성취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부모들은 최고급 사교육으로 자식들을 중무장시킨다. 이런 노력마저 하기 싫은 부모들은 자녀의 대학 입학을 위해 부정과 위법까지 서슴지 않는다. 캠퍼스는 있는 집 자식들로 넘쳐 나고 계층 이동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간 자식들은 자신의 부와 지위가 스스로 성취한 것인 양 오만하게 군다. 이를 지켜보며 대학 갈 기회를 갖지 못한 자,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자들의 분노는 쌓여 간다. 샌델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분노 저변에는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 등 이전 민주당 정부의 엘리트 우선주의, 능력주의 우대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페덱스 배송 직원이 지난 9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배송 물품을 나르고 있다.택배 기사는 카지노 영업 책임자보다 급여가 적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와 존엄 면에서는 택배 기사의 일이 더 중요하다./AFP연합뉴스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한 해결책도 몇 가지 제시한다. 예를 들어 명문대 수학 능력이 있는 학생들 중에서 추첨식으로 입학 자격을 주자고 제안한다. 말이 안 된다 싶기도 하지만 타고난 능력도, 어떤 부모를 만나는 지도 운에 달려 있는 만큼 이런 식의 입학 방식이 큰 무리수는 아니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다양한 노동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는 사회적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샌델 교수에 따르면 엘리트 코스를 밟은 월가의 금융인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지만 사실 금융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대학을 가지 못한 노동자들이 하는 일 중에 사회에 꼭 필요한, 공동 선에 기여 하는 생산적 노동이 많다. 샌델 교수는 세제 개편 등을 통해 이런 생산적 노동에 모멸이 아닌 존엄을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인간은 죽도록 노력해도 순수하게 제 능력으로 자수성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천부 재능, 성장 환경, 사회 시스템 등에 수많은 우연이 작용한다.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할 때 겸손이 비롯되고, 연대와 공동 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고 샌델 교수는 강조한다. 1만8,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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