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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론직설] "과학기술, 정치 도구로 전락...'팍스 테크니카 시대' 초격차 전략 절실"

이우일 과총 회장

코로나19 대책 등 국정에 전문가 의견 잘 반영 안돼

과학기술 관련인사도 과기계 컨센서스 없이 일방통행

27조 정부 R&D 나눠먹기식...논문·특허 쪼개기 만연

룬샷·벤처캐피털 제도로 국가혁신 생태계 만들어야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이 21일 서울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 때의 과학기술 중심 사회 철학이 후퇴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승현기자






“노무현 정부에서 과학기술 중심 사회를 얘기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과학기술이 사회 변화를 선도하는 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기술 지배) 시대인데 오히려 과학기술계를 뒷전 취급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정부 연구개발(R&D) 시스템도 황당한 연구조차 과감히 허용할 수 있는 아량과 문화·생태계를 갖춰야 하는데 일률적인 관리가 혁신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은 2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도 보듯이 국정 전반에 과학기술계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는다”며 이같이 밝혔다. 정치인이 여전히 과학기술을 경제개발의 도구쯤으로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정부도 R&D 예산(내년 27조 2,000억 원)을 지원할 때 일률적으로 관리해 혁신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신뢰하고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이 회장은 “과총이 주최한 많은 코로나19 포럼에서 병상 대폭 확대 등 중환자 대책을 역설했지만 잘 반영되지 않았다”며 “정부가 법조계나 의료 분야에서 변호사협회·의사협회와 상의하는 것처럼 과학기술 쪽은 과총 등 과학기술계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높지 않다는 얘기가 많다.

△지난 9월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20개국 3만 2,000명을 대상으로 과학계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해 발표했는데 우리나라는 과학자를 신뢰한다는 답변이 14%로 20개국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기업인 등 다른 직업군에 비해 일견 신뢰도가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그야말로 신뢰 부재 사회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반성하고 있다. 이념 성향별로는 미국과 캐나다 등 해외에서 진보가 보수에 비해 갑절 이상 과학자를 더 많이 신뢰했으나 우리나라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 과학기술계의 의견이 국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다. 과총은 그동안 코로나19 토론회를 20차례나 가졌다. 중환자 대책과 관련해서도 3월 신천지 교인을 중심으로 대구·경북에서 환자가 많이 나왔을 때부터 선제적으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과학기술 관련 위원회를 구성할 때도 과학계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는 구조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중심 사회를 많이 얘기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후퇴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계가 국민과의 소통을 등한시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자의 말이 잘 반영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된다.

-과학기술계 입장에서 억울한 점은 없나.

△연구비를 유용하면 엄벌에 처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일부의 일탈 행위에도 마치 모든 과학기술계의 잘못인 양 매도되고 있다. 기업에 대한 대학이나 연구소의 기술이전도 규정이 잘 갖춰져 있지 않다. 예컨대 어떤 기술을 1,000만 원에 넘겼는데 5년 뒤 가치가 1,000억 원으로 커지면 배임으로 형사 고발될 수 있다. 최근 한 KAIST 교수가 중국의 ‘천인 계획’에 참여해 핵심 기술을 넘겼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전에 문제가 없다가 (미중 경제 전쟁이라든지) 일이 터지면 이런 일이 생긴다.



-결국 신뢰 부재 사회는 우리 모두의 손해가 아닌가.

△과학창의재단이 2018년 만 19~69세 1,030명과 만 13~18세 512명을 대상으로 과학기술 관심도를 조사하니 성인은 100점 만점에 39.2점, 청소년은 47.2점이었다. 이렇게 신뢰와 관심이 낮아지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학기술계 기관장이나 위원회의 연속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과학계의 의견 수렴도 거치지 않고 한꺼번에 바꾼다. 대통령이나 총리 직속 위원회를 보면 법조계나 의료계 분야와 달리 과총이나 과학기술 단체의 추천권을 아예 보장하지 않는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과총 등 과학기술 단체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지지 않나. 그런데 과학기술계와의 공감대도 거치지 않은 채 중요한 자리를 채우는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이뤄진다. 과학계에서는 ‘정치를 열심히 한 사람이겠군’ 이라고 치부한다. 과학기술계는 법조계나 의료계와 달리 띄워준다고 복지나 소득이 느는 이익 단체가 아니다.

-국가 R&D 생태계에서 과감한 혁신이 이뤄지지 못하는데.

△물리학자이자 바이오 회사 창업자인 사피 바칼의 저서 ‘룬샷(Loonshots)’처럼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소위 미친 아이디어를 허용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황당하고 괴짜 같은 짓을 과감히 수용하는 아량과 문화·생태계를 갖춰야 한다. 지금처럼 국가 R&D를 하나의 룰로 관리한다면 혁신이 이뤄지지 않는다. 굉장히 많은 돈을 쓰지만 성과가 낮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비록 명문화된 규정은 없지만 정부 돈 1억 원을 지원하면 SCI(미국 과학정보연구소(ISI)가 인정한 고급 학술 잡지)급 논문 1편, 특허 1개를 받아야 한다는 식이다. 일률적인 관리가 혁신을 저해한다



-다양성을 확대해 혁신을 용인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 대학들은 논문만 근거로 삼아 임용·승진을 평가한다. 미국 벨연구소의 블루스카이리서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하늘만 보고 멍 때려도 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잣대로 연구비를 나눠주니 논문 쪼개기, 특허 쪼개기가 이뤄져 관리도 잘 안 되는 싸구려 특허가 양산된다. 이게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소들의 현실이다. 이제는 정부 R&D 예산 중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몇 년간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일본은 교수와 조교수들이 한 해 몇 천만 원을 받아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생활비로만 유용하지 않으면 자유로운 연구 활동이 가능하다. 니치아화학공업에서 청색 발광다이오드를 개발해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나카무라 슈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는 군사작전하듯이 관리하는 데서 탈피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레이더도 혁신적인 룬샷의 사례가 아닌가.



△처음 레이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미국 군 내부에서는 예산 낭비 우려가 컸다. 하지만 전후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을 만들어 총재를 한 버니바 부시가 히틀러의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이유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밀어붙였다. 전쟁 전에는 과학연구개발국(OSRD) 설립을 건의해 관철시켰다. 레이더도 개발하고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도 제안했다. 당시 미군은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으나 결국 레이더와 암호해독, 공업 생산 증가, 미드웨이 해전 등 과학기술로 인해 승리할 수 있었다.

-우리 정치인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한참 떨어지는 듯하다 .

△어느 나라든 정치인들은 과학기술을 부차적인 도구나 장식물로 생각한다. 특히 우리는 경제개발의 도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과학기술이 사회 변화를 선도한다. 코로나19 극복도 결국 백신에 달렸다. 인공지능(AI), 바이오, 로봇 등도 모두 판을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 기술이다. 미중 냉전에서 보듯 과학기술이 번영과 안전을 담보하는 팍스 테크니카 시대가 왔다. 그런데 과학기술계의 의견은 듣지 않고 관심을 갖는 패러다임에만 머물다 보니 빠른 추격자(패스트 팔로어)에서 선도자(퍼스트 무버)로 바뀌지 못하고 있다.



-정부 R&D 예산은 급증하는데 미처 혁신 성과가 따라가지 못하는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2018년 미국의 기술 수준을 100으로 보고 한국, 중국, 일본, 유럽연합(EU)을 비교한 보고서를 보니 중국은 76%까지 높아졌더라. 하지만 일본은 2012년의 93.4%에서 2018년 87.9%로 많이 떨어졌고 한국도 77.8%에서 76.9%로 소폭 감소했다. 이 기간 우리 R&D 예산은 크게 늘었는데도 말이다.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게 하려면 문화·조직·토양이 달라져야 하는데 아직 요원하다. 18개 부처 중 거의 모든 부처가 과학기술과 연관돼 있어 과기 중심 국정 운영으로 가야 한다.

-과학기술 초격차 전략을 위해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권오현 삼성전자 고문이 초격차 전략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실패에 대한 문책이 성공에 대한 보상보다 압도적으로 크다고 진단했다. 성공에 대한 보상 체제를 제대로 해야 혁신이 이뤄진다. 대량생산에서 실패를 줄이려는 기업의 품질 경영 기법(식스 시그마)을 국가 R&D에도 적용하는데 어떻게 혁신적 연구가 되겠나. 출연연에서 경력을 보지 않고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것이나 책임과 역할(R&R)을 강제하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지만 이제는 그만 풀어줘야 한다. 출연연의 PBS(정부·기업에서 프로젝트 수주하는 시스템)도 연구비를 적당히 따서 수입만 조금 올리면 되는 구조인데 확 바꿔야 한다. 출연연을 혁신 엔진으로 활용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지금처럼 기획재정부에서 출연연을 기타 공공 기관으로 분류해 다른 공공 기관과 엇비슷하게 평가한다면 혁신이 힘든 구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출연연 기관 평가에서 두 번째 단계인 우수 등급까지 받을 경우 원장(3년) 연임이 가능하도록 내년 하반기부터 바꾸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평가받다가 끝나면 안 된다.



-정부 R&D 시스템도 벤처캐피털 방식을 도입하자는 얘기가 있는데.

△벤처캐피털이 투자할 때 많은 투자처가 망하더라도 한 곳에서 100배를 늘려 평균 2배의 수익률을 올리는 것처럼 혁신은 그렇게 해야 한다. 코로나19 백신 개발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나. 골고루 투자해 평균적으로 조금씩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100배 튀기려면 10개는 실패한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데이터 등 과학기술에 관한 국정 철학이 미흡하다는 말인가.

△과학기술 예산이 매년 느는 것은 환영하지만 이를 운용하는 시스템, 특히 철학이 없는 것이 문제다. 참여정부 때 과학기술 중심 사회를 표방했지만 그 이후 다 없어지고 아직도 국정의 중심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냥 변방에서만 떠돌고 있다. 혁신하려면 시스템 구축과 관심이 필요한데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적고 돈만 주고 관리만 하려고 하니 잘 안 된다.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기술 의사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 1986년 미국 우주왕복선인 챌린저호 폭발 사고도 과학기술 문제를 특별위원회의 정치적 의사 결정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나이팅게일도 크림전쟁 당시 데이터에 입각해 병사의 사망 원인을 비위생적 환경으로 보고 개선해 사망률을 5개월 만에 42%에서 3%로 크게 낮출 수 있었다.



-현재 과총의 주력 활동은.

△과학기술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다. 2월 취임 이후 산·학·연·정과 50여 회의 온라인 포럼을 열고 해외 각국의 한인 과학자들 모임인 18개 재외한국과학기술자협회와도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국민과의 소통을 넓히고 젊은이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과학계가 사회적 흐름에 맞춰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데.

△재러드 다이아몬드 미국 UCLA 교수의 주장처럼 인구 감소를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만들려면 국민 각자가 과학기술로 무장하고 주특기를 하나씩 갖춰야 한다. 그러자면 과학기술 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하는데 오히려 대학 입시에서 수학과 과학의 범위를 줄이고 있다. 탁상행정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대학도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졸업장 장사’이지만 과목의 특성에 따라 수업 기간도 다르게 하고 커리큘럼도 크게 바꿔야 한다. 대학 등록금이 12년째 동결돼 역량도 부족한 외국인 학생들에게 재정을 의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두뇌 유출도 큰 문제인데 대학에 AI를 가르칠 사람이 태부족이라 교수와 국내외 기업체와의 겸직도 확대해야 한다. 싱가포르처럼 해외 인재를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논산훈련소 같은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특전사처럼 주특기를 갖고 세계 시장에서 뛰게 해야 한다. 농업도 젊은이들이 농촌에 가도록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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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기계공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연구원을 거쳐 지난 1987년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로 부임해 학부장, 공대 학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전국 2,500여 명의 공대 교수들이 회원인 대학산업기술지원단(UNITEF) 단장을 맡아 중소기업과 대학을 연결했다. 산학 협력과 공학 교육 개혁에 관심이 높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며 미국기계학회(ASME) 석학 회원(펠로)이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지난 2월부터 600여 개의 학회, 공공연구기관, 과학기술 단체를 대표하는 과총 회장(임기 3년)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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