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AH오토모티브가 P플랜(사전회생계획제도) 및 자금 지원 계획을 최종 결정하지 않고 출국했다. KDB산업은행은 HAAH와 쌍용차가 자금 조달 등 관련 계획을 확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先) 금융 지원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쌍용차의 P플랜에 빨간불이 켜진 것으로 당분간 유동성 위기가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HAAH 측 협상 책임자들은 지난달 31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최대현 산은 선임부행장은 지난 2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현재까지 쌍용차는 P플랜 관련 사업 계획, 회생 계획안을 준비 중”이라며 “쌍용차의 자료 제출이 늦어지면서 출국 일정이 잡혀 있던 잠재적 투자자가 P플랜에 대한 최종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출국했다”고 말했다.
현재 HAAH는 쌍용차에 2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진하되 산은에 같은 규모의 금액 지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안영규 산은 기업금융부문장은 “잠재적 투자자에 자금 조달 증빙을 요구했으나 현재까지 제시하지 않고 있다”며 “잠재적 투자자는 쌍용차와 협의해 회생 계획안이 마련되면 그에 근거해 자금 조달 증빙을 발급받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당초 HAAH 측은 지난달 23일 출국 예정일이었으나 협상이 지지부진해 출국일을 한차례 미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협상이 최종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국을 강행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HAAH 측이 산은에 자금 지원을 압박하는 행보로 보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HAAH 측의 출국은 인수를 포기하겠다는 의사 표현이라기보다 자신들이 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만큼 쌍용차 회생에 필요한 나머지 조건은 쌍용차와 산은이 맞춰달라는 무언의 항변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HAAH와 쌍용차·산은 측이 자금 지원 규모와 조건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HAAH 측은 협상 실무를 국내 대형 법무법인에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산은은 구체적 사업 계획 없이 금융 지원을 결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간산업안정기금을 통한 지원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쌍용차가 HAAH와 협의해 P플랜을 마련하면 산은은 이를 평가해 수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P플랜은 채무자가 사전 계획안을 법원에 제출하고 법원이 이를 심리·결의해 인가해주는 법정관리의 한 방식으로 산은 등 채권자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산은은 외부 전문 기관의 평가를 통해 계획안의 지속 가능한 사업성을 판단하겠다는 방침이다.
최대현 산은 선임부행장은 “(지금은) 산은이 금융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라며 “향후 쌍용차와 잠재적 투자자 간의 협의 하에 회생 계획안이 마련되면 채권단은 투자 집행 이행, 사업 계획의 타당성 등을 확인한 후 P플랜 동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쌍용차가 P플랜을 제출하지 못하거나 계획안이 미흡하다고 판단될 경우 법정관리가 불가피해진다. 이 경우 산은은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이해가 높은 전략적 투자자를 유치해 회사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문제는 산은의 방침과 달리 쌍용차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데 있다. P플랜이 늦어지면 부품 업체들이 줄도산하고 자동차 생산에 큰 차질이 빚어지면서 회생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P플랜 없이 이달 말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법원이 쌍용차의 청산 가치와 회생 가치를 비교해 쌍용차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업계에서는 쌍용차의 부채 규모와 미래차 경쟁력을 감안할 때 청산 가치가 높게 나올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특히 자동차 시장이 전기차로 빠르게 전환하는 상황에서 쌍용차의 경쟁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거세다. 안영규 산은 기업금융부문장 또한 “상대적으로 많은 국내외 기업이 전기차에 앞서고 있다”며 “쌍용차는 현재 주력 모델이 디젤인 상황에서 전기차 부문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쌍용차를 둘러싸고 산은과 HAAH 간 힘겨루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쌍용차는 이미 일부 협력 업체의 납품 중단으로 공장 가동에 차질을 빚고 있다. 쌍용차 평택공장 조립 라인은 전날부터 사실상 가동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차 협력 업체 비상대책위가 지난달 28일 쌍용차의 P플랜 돌입에 동의했지만 이에 참여하지 않은 대기업 부품 업체와 일부 영세 업체들이 미결제 대금 지급을 요구하며 부품 공급을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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