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땐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부러워했던 것이 ‘체험 학습’이었다. 교과서밖에 몰랐던 우리 세대의 교육에 비하면 훨씬 더 삶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오감을 모두 만족하는 생생한 배움’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체험 학습을 오직 입시를 위한 점수 따기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런 나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아이들을 위한 체험 학습을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에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오케스트라 체험 학습’을 빌미로 각종 지원 사업을 통해 국고보조금을 부정 수급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예다. 수업도 하지 않고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사진과 평가 및 각종 기록을 조작하는 어른들이 있다니. 출석부와 수업 일지를 조작해 토요일마다 아이들을 위한 오케스트라 수업을 했다고 보고하도록 지시한 사람들은 단지 비리만 저지른 것이 아니라 어린이의 복지와 교육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다.
‘체험의 상품화’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언제부터인가 각종 체험들은 ‘돈이나 점수로 교환 가능한 대상’이 됐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체험이 아닌 점수로 따지고 스펙으로 평가되고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상품으로서의 체험으로. 아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거나, 육체 노동을 경험하는 것, 각종 자원봉사 활동을 모두 ‘점수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점수가 되지 않는 모든 살아있는 체험’은 오히려 도외시된다. 돈을 들여 체험 학습을 하고, 이를 점수로 연결하는 성과주의적 사고방식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체험의 진실성과 과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빼앗는다.
어린 시절, 시골 외할머니댁에서 깻잎 무침을 직접 해 먹은 적이 있었다. 뙤약볕에서 깻잎을 따는 일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오후 내내 깻잎을 따다가 일사병에 걸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더위였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서 갓 딴 깻잎으로 만든 장아찌는 천상의 맛을 자랑했다. 다시는 그런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것이 외할머니의 비법 양념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 그 비법 양념의 레시피대로 깻잎장아찌를 담가 먹어도 그때 그 맛을 결코 되살릴 수 없었다. 깻잎장아치가 너무 맛있는 나머지, 그 옆에 가득 놓인 갓 구운 삼겹살은 입에도 대지 않을 정도였다.
직접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깻잎을 어디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양념에 버무려 먹은 것. 그것이 천상의 맛이 지닌 핵심적 비밀이었다. 어린 시절 그 고사리 손으로 직접 갓 딴 깻잎으로 그 어떤 복잡한 제조 공정도 거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반찬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늘도 파도 깻잎도 모두 외할머니의 텃밭에서 딴 것들이었으니까. 그 채소들이 지닌 알싸한 야생의 향기는 그 어떤 도시의 채소 가게에서도 살 수 없는 보물이었다. 밭에서 갓 딴 깻잎은 알싸함을 넘어 상큼하고 톡 쏘는 맛, 심지어 달콤하고 새콤한 맛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마트에서 자주 사던 깻잎은 온갖 유통 과정을 거쳐, 채취한 지 며칠 지난 후 거의 잔향이 남지 않은 상태의 깻잎이었던 것이다. 깻잎을 따서 하나하나 양념장을 발라 만들기까지의 추억은 그 어떤 체험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결코 스펙이나 수행 평가 같은 곳에 넣을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모든 체험을 수행 평가나 수시 입시를 위한 도구로 바꿔버리는 어른들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 체험을 체험 그 자체로 바라보는 해맑은 눈, 감귤나무를 체험의 판매 대상인 아닌 향기로운 귤꽃이 피어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해맑은 눈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경험을 평가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살아있는 체험을 냉혹한 가치 매김으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경험을 사고파는 행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해내야 한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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