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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혁신적 보험상품은 실패했나

안철경 보험연구원장





주말 저녁의 와인 한잔은 주중의 피로를 씻어주고는 한다. 그러나 간혹 기분에 취해 건배하다 와인 잔이 부러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깨지지 않는 와인 잔을 왜 만들지 않을까.

깨지지 않는 와인 잔은 이미 약 2,000년 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에 만들어졌다. 한 기술자가 깨지지 않는 유리잔을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그러나 황제는 그에게 큰 상을 내리는 대신 그를 죽여버렸다. 깨지지 않는 유리잔 때문에 금과 은의 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2,000년이 흐른 후 깨지지 않는 유리는 다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깨지는 와인 잔을 사용한다. 대신에 깨지지 않는 유리잔은 핸드폰터치 화면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국 보험 시장의 문제점을 논할 때 매번 언급되는 것이 상품의 복잡성이다. 어떤 상품은 특별 약관이 100개가 넘어간다. 아인슈타인이라도 보험 상품의 모든 보장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보험약관 자체가 어렵고 여기에 수많은 특약을 첨부해 복잡하게 만들다 보니 소비자 입장에서 보험료도 비싸고 이해도도 떨어져 불완전 판매와 민원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보험 상품의 복잡성은 보험의 최대 골칫거리다.

그런데 몇 년 전에 H생명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제로보험’을 내놓았다. 복잡한 보험 상품을 최대한 단순화해 개발한 상품이었다. 아마 제로라는 것이 특약이 없는 상품이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로보험의 특징은 특약을 부과하지 않아 단순하고 보험료가 저렴한 것이다. 개발과 동시에 혁신 보험 상품의 아이콘으로 당국의 칭찬은 물론 언론이 주는 대부분의 상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 상품은 몇 년 못 가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판매가 되지 않아서다. 단순하다 보니 보험료가 저렴해 판매자의 수수료가 낮았다. 판매자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험료가 싸다 보니 회사 입장에서도 상품 수익성이 떨어졌다. 더 나아가 고객 입장에서도 상품의 보장 내용이 단순 쪼개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들었다. 보험료를 조금만 더 내면 많은 보장을 받는 상품에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다. 깨지지 않는 유리잔처럼 이 혁신적인 상품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깨지지 않는 유리잔이 부활하는 데 2,000년이 걸린 것과 달리 최근 제로보험과 유사한 미니보험, 소액 단기 보험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디지털 상품 및 판매 혁신, 그리고 필요한 것만 구매하는 소비 패턴으로 인해 이러한 추세는 점점 강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보험 최대의 골칫거리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혁신 상품은 역시 실패하지 않았던 셈이다. 단지 깨지지 않는 유리잔처럼 시대를 앞섰을 뿐이다.

한때 혁신적인 보험 상품이었지만 고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은 상품이 또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살펴봐야겠다.

/김현진 기자 sta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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