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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삶의 '숨구멍' 이었습니다[책꽂이]

■구멍가게 이야기(박혜진·심우장 지음, 책과함께 펴냄)

때론 은행…때론 술집…때론 놀이터…

생필품 살때, 편지 부칠때 찾던곳

마을주민 멀티플렉스이자 사랑방

도심선 못보지만 시골 곳곳 흔적

전국 100여곳 돌며 '이야기' 담아







똑 떨어진 생필품을 사야 할 때, 동네 소식이 궁금할 때, 이웃 사람들과 간단히 술 한 잔 하고 싶을 때, 담배를 사거나 편지를 부쳐야 할 때, 동네 구멍가게를 찾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온라인을 통해 바다 건너 있는 이들까지도 하나로 묶이는 ‘초(超)연결 사회’에 사는 오늘날 도시인의 시선에선 좀체 와 닿을 얘기가 아니지만, 구멍가게는 마을의 우체국이자 술집이며 놀이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냈다. 도시에서는 1990년대 초반 이후 구멍가게의 풍경이 자취를 감췄지만, 눈길을 시골로 돌리면 세월을 버텨낸 흔적을 가진 구멍가게들이 지금도 꿋꿋하게 남아 있다.

전남 담양의 구멍가게 '영천리 구판장'. 지금은 문을 닫았다. /사진제공=책과함께


신간 ‘구멍가게 이야기’는 사람살이로서의 구멍가게가 갖는 의미와 역할을 인문학적 시선에서 되짚어보는 책이다. 구멍가게를 경제적 측면에서 몰락하는 골목 상권의 일부나 동화 같은 추억의 소재로 미화하려는 기존의 시선을 넘어 좀 더 입체적인 조명을 시도했다. 문화 산업과 설화, 민속 등을 연구하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빙해 온 저자들은 평소 학술 답사를 가서 이야기를 채록하다가 구멍가게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들은 “좀 더 마음 편하게 구연하는 삶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가 구멍가게로 결정했다”며 “가게를 운영하신 분들만의 색다른 경험담이 분명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2011년 11월부터 약 3년 간 전남 지역 22개 시?군의 구멍가게 백여 곳을 찾았고, 이 중 58곳에서 주인과 단골손님을 인터뷰했다.

저자들이 오랜 기간의 현장 답사와 인터뷰를 거쳐 이야기하는 구멍가게는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일상의 역할을 해내는 멀티플렉스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단순히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우체국·택배사와 마을을 잇는 운송대행사, 외상 거래는 기본이고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은행, 안주가 무상·무한 리필되는 술집,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놀이판이다. 동네 사람들은 일하다가 꾀죄죄한 행색으로도 수시로 들러 서로의 소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마을의 규칙과 가치는 구멍가게를 통해 유지·전승된다.

전남 해남의 ‘초호리 슈퍼’ 앞 평상에서 간식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네 주민들. /사진제공=책과함께




이는 지금은 ‘하나로마트’로 불리는 농협 연쇄점이 들어선 1980년대 이후에도 구멍가게가 살아남은 원동력이었다. 상업적 기능을 뛰어넘어 마을 사람들 간 관계를 잇는 핵심은 마트가 수행할 수 없었다. 전남 보성 ‘미력슈퍼’의 한 단골손님은 농협 연쇄점이 더 싸지만 “구태여 그리 안 가지. 여기서 가져가. 나도 모르겄어, 미스테리여”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구멍가게에는 숨은 공간을 활용한 진열대나 주변 물건을 활용한 술 탁자 등 각종 참신한 인테리어들이 등장하고, 과자·라면·담배·술 등 익숙한 상품들이 팔려나간다.

책은 구멍가게의 이런 역할은 주인들이 감정과 이성을 적절히 통제하며 중간자 역할을 잘 한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들이 바라보는 가게 주인은 마을 공동체에 속하면서도 한 걸음 떨어진 주변인이다. 곡성 ‘근촌리 점빵’ 주인 아저씨는 “곽(관) 속에 들어서도 큰소리 하지 말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무겁고 신중한 입놀림을 강조한다.

전남 무안의 ‘해광상회’에는 시멘트로 만든 술탁자가 손님들을 기다린다. 구멍가게는 동네 사람들이 간단히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사진제공=책과함께


구멍가게 주인들은 마을에서도 주변인이었으니 일상이 고단할 수밖에 없다. 농촌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농사지을 땅이 없어 먹어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마지막 길인 경우가 많았다. 전남 구례의 ‘죽마리 구판장’ 주인 아주머니는 “다시 태어나믄 절대로 안 하지. 인연인데 나는 진짜로 이런 인연 같으믄 진짜로 안 해”라며 “이런 가게에서 술 팔아서 돈 버는 거는 진짜 귀신도 맘대로 못 쓸 거예요”라고 말한다.

책은 구멍가게 곳곳에 숨은 디테일이 눈에 띌 때마다 찍어 놓은 사진, 오랜 기간 답사하고 주인과 손님들을 인터뷰하며 쌓아온 기록을 풍성하게 풀어놓는다. 저자들이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 약 10년 만에 구멍가게를 다시 찾았을 때, 과거 답사했던 58곳 중 24곳은 문을 닫았다. 저자들은 더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출간을 서둘렀다. 이들은 책을 내며 “숙제를 마쳤다”면서 현재가 어떻든 변한 모습도 구멍가게 주인들의 최선이 담긴 삶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2만8,000원.

전남 보성의 ‘미력슈퍼’. 삼거리 복판에서 손님들을 맞이한다. /사진제공=책과함께


/박준호 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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