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 가락고등학교 호학당에는 ‘뱀파이어로 철학하기’를 주제로 특별강좌가 열렸다. 강의 시작을 앞두고 1~2학년 학생들 40여명이 하나둘 호학당에 자리했다. 집에서 비대면 정규수업을 마치고 이 강좌를 듣기 위해 서둘러 학교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제법 무더워진 날씨에 강의를 놓치지 않으려고 급한 발걸음을 한 학생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날은 뱀파이어를 주제로 총 3회 구성된 강좌의 두 번째 시간이었다. 강의를 맡은 영화전문가 박일아 한국영상자료원 겸임연구원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영화를 보며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운을 뗐다. 닐 조던(Neil Jordan) 감독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는 앤 라이스(Ann Rise)의 장편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72)’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박 연구원은 원작 소설에 대해 “여섯 살된 딸을 잃은 작가 앤 라이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가 담겨있다”고 소개했다.
이날 박 연구원은 학생들과 함께 영화의 장면을 보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반복하며 주제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 뱀파이어 ‘루이’에게 또 다른 뱀파이어 ‘알망드’가 ‘선을 인식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가. (타오른는 촛불에 자신의 손을 넣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 느낌, 이것만이 유일한 악이야’라고 말하는 영화 장면을 보고 학생들은 ‘알망드가 생각하는 악의 기준’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죽음만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자신의 생존을 위해 흡혈을 하는 것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등 학생들은 선과 악에 관한 진지한 생각을 이어갔다.
학생들과의 토론을 마친 박 연구원은 “알망드는 자신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도덕적·윤리적인 가치관이 없는 알망드는 욕망과 쾌락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이어 알망드가 ‘세상은 변하는데 뱀파이어는 변하지 않아서 이 모순이 불멸의 삶을 살 수 있음에도 뱀파이어를 자멸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이 장면에 대해 박 연구원은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발전과 성장을 의미한다”며 “쾌락과 욕망만 추구하는 뱀파이어들은 세상이 변해도 성장할 수 없어 자멸해 버리는 것”이라며 스스로 선과 악의 가치관을 세우고 자기반성을 하며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박 연구원은 스크린에 그림 하나를 띄워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밤하늘이 보이는 창 아래서 뱀파이어 셋이 식탁에 앉아 토마토, 수박 등 붉은 색의 음식에 빨대를 꼽고 즙을 빨아 마시는 그림이다. 식탁 밑에는 수탉같이 생긴 반려동물도 보인다. 레메디오스 바로 (Remedios Varo)의 작품 ‘채식주의 흡혈귀들(1962)’이다.
다른 생명체와의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한 박 연구원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서 스스로 절제하고 배려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절제는 진정한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송파도서관이 마련한 이번 박 연구원의 강좌는 ‘고인돌2.0(고전·인문아카데미2.0: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최됐다. ‘고인돌2.0’은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과 서울시교육청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 2013년부터 함께한 인문학 교육 사업이다. 성인 중심의 인문학 강좌로 시작한 ‘고인돌’은 지난해부터 명칭을 ‘고인돌2.0’으로 바꾸고 서울 전역의 중·고등학교와 연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역사와 건축, 경제, 과학,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총 56개 강좌로 구성된 올해 제9기 ‘고인돌2.0’은 특히 교과목과의 연계성을 높여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원격 강의 등 비대면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가락고 1학년 노지아 양은 “뱀파이어를 소재로 선과 악, 절제와 욕망이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수 있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주애 가락고 영어 교사는 “전문가의 깊이 있는 강연으로 학생들이 선과 악에 대해 스스로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며 “이 같은 인문학 강연을 통해 학생들이 세상을 넓고 깊게 이해하는 관점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인돌 2.0은 올 11월까지 80여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들의 인문학의 사고를 높이기 위한 강연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 이효정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원 hj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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