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고전 통해 세상읽기] 雪憤伸寃(설분신원)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원통한 사건 사고 진실·책임 규명은

분노 녹이고 통쾌하게 풀어낼 수 있게

시간 걸려도 명백히 밝히는 과정 중요

재발 방지위해 현실성 있는 제도 마련을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근래에 산업 현장과 군대에서 가슴 아프고 억울한 일을 겪은 후 원통함을 토로하는 일이 적지 않다. 공군에서 성추행이 일어났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혀 책임을 따지기보다 오히려 은폐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로써 피해자는 성추행의 피해에 그치지 않고 n차 피해를 겪으면서 혼인신고를 하는 날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 공군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그리고 피해자의 적절한 보호 등 기본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사건 무마와 회유에 나서자 피해자는 더 이상 자신을 지키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노동자 김용균 씨가 일하다 숨진 이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돼 시행됐지만 아직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중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 등과 같은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말 부산 신항 물류센터에서 후진하던 대형 지게차에 깔려 항만 노동자가 숨지고 같은 날 코로나19로 고된 업무에 시달리던 간호직 공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로 이튿날에는 음식 폐기물 처리장 오수조를 점검하던 노동자가 직장 내 갑질 등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해당 기관과 정부는 사과하고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재발 방지에 미흡하다. 일시적인 대책이 아니라 확실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제도의 혁신이 필요하다. 예컨대 여러 분야에서 안전 관리나 안전 노동의 지수를 평가 항목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요즘 기업 경영에서 환경보호, 사회 공헌, 윤리 경영의 앞 글자를 딴 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날로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에서는 기업을 평가할 때 이미 ESG를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기업이 앞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지속 성장을 하려면 ESG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ESG에 안전 노동을 가리키는 ‘S(Safe)’를 추가해 ESGS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다른 사건·사고도 마찬가지겠지만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사고는 발생 이후에 진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책임을 엄중하게 지우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건·사고는 발생 자체만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는 힘겹고 버티기 어려운 고통을 준다. 진실이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응분의 책임을 정확하게 지우지 않으면 고통이 줄어들지 않고 분노가 커지고 원통이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진실과 책임의 규명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 시간이 진실과 책임을 향한 전진이라면 속도가 늦더라도 설욕과 신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이 시간이 진실과 책임을 덮는 시늉의 절차가 되면 속도의 빠르기와 상관없이 분노와 원통의 절망이 생겨난다.

조선시대 박인로는 1605년(선조 38년)에 통주사(統舟師)로 부산에 부임할 때 배 위에서 임진왜란에서 당한 고통을 떠올리며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선상탄(船上嘆)’이라는 가사로 읊은 적이 있다. 그는 세월이 흘렀지만 씻을 수 없는 만고의 치욕을 아직 백분의 일도 씻어내지 못한 자신을 돌아본다. 박인로는 자신의 강개와 기개가 높지만 병든 몸이라 분노를 눈처럼 녹이고 원통을 통쾌하게 풀어내는 ‘설분신원(雪憤伸寃)’이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는 잠깐 낙담을 뒤로하고 자신은 손발이 온전하고 목숨이 살아 있는 한 나는 듯이 빠른 배의 선봉에서 구시월 서릿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도이(島夷), 즉 일본을 물리치리라 다짐하고 있다. 마무리에 그는 무조건 전쟁을 부추기지 않고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잊힐 만하면 일어나는 가슴 아프고 원통한 일은 박인로의 설분신원(雪憤伸寃)처럼 재발하지 말아야 한다. 박인로가 임진왜란의 치욕을 문학적으로 승화했다면 우리는 현실성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사고를 혁신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와 원통이 쌓이고 쌓이는 ‘적분누원(積憤累寃)’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여론독자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