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및 온두라스와 국경을 맞댄 엘살바도르는 국내총생산(GDP)이 270억 달러(2019년 기준)에 불과한 빈국이다. 국토 면적은 경상북도 크기, 인구는 인천과 부산을 합친 정도다.
이런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공식 인정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내세울 것 없는 ‘중남미 빈국’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엘살바도르의 공식 법정통화는 미 달러화다. 지난 2001년 달러화를 법정화폐로 승인하면서 100년 넘게 유통돼온 자국 통화 ‘콜론’을 사실상 버렸다. 만연한 부정부패와 창궐하는 범죄 등으로 지하경제가 비대해지면서 콜론이 시장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엘살바도로가 비트코인을 공식 통화로 받아들인 데는 달러에 대한 피해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코로나19 등 경제위기 때마다 미국이 달러를 대거 풀면서 엘살바도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왔다. 나이브 부켈레(사진) 엘살바도르 대통령도 “미국이 엘살바도르의 경제 안정을 해치는 쪽으로 가고 있다”며 경제 실패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상황이다.
경제의 대외송금 의존 20%인데 수수료로 10% 떼여
엘살바도르는 해외에서 일하는 자국민들이 보내는 대외 송금이 전체 GDP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 송금을 위해서는 글로벌 송금 업체인 웨스턴유니언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약 10%를 수수료로 지불한다. 1만 달러를 보내면 1,000달러를 오롯이 수수료로 내야 한다는 얘기다.
송금 과정도 쉽지 않다. 엘살바도르 전역에는 약 500곳의 웨스턴유니언 사무실이 있는데 발품을 팔아 이곳을 직접 방문해야 한다. 송금에 며칠이나 걸리고 이 과정에서 발신인과 수신인의 신분도 증명해야 한다. 절차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비행기를 타고 직접 돈을 갖다주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부켈레 대통령은 비트코인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복안을 가졌다. 엘살바도르 정부가 제시한 메커니즘은 이렇다. 해외 노동자들이 엘살바도르와 파트너십을 맺은 디지털 지갑 업체 ‘스트라이크’에 달러를 보내면 스트라이크가 비트코인을 매수해 엘살바도르 중앙은행으로 이체한다. 수신인은 엘살바도르 중앙은행을 찾아 달러나 비트코인 중 원하는 화폐로 찾으면 된다. 비트코인과 달러의 교환 비율은 자유시장에서 결정된다.
스마트폰을 가졌다면 누구나 지갑을 통해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송금과 수금이 가능해 편의성을 높이는 데다 송금 수수료도 기존보다 훨씬 저렴한 만큼 국가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부켈레 대통령은 "해외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들이 국내로 돈을 보내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부켈레 “저축도 높이고 산업도 살리겠다”
엘살바도르 국민의 70%는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높은 범죄율 등으로 현금 보유가 위험하다고 여겨 돈을 버는 족족 써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비트코인 지갑이 도입될 경우 자연스럽게 저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CNBC는 "비트코인 보유자들은 은행 계좌를 개설하지 않고도 은행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비트코인 관련 기업들이 엘살바도르로 몰려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부켈레 대통령은 "비트코인의 1%가 엘살바도르에 투자된다면 GDP가 약 25% 증가할 것"이라며 "국가에 금융 수용성과 투자·관광·혁신·경제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전망이 지나치게 장밋빛이라는 지적도 많다. 엘살바도르는 범죄율이 높은 국가다. 현금 사회로 지하경제가 나라를 이끈다. 대부분의 국민은 금융 문맹에 가깝다. 지하경제를 양지로 끌어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의 실험이 결국 실패로 끝나더라도 잃을 게 없는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가운데 엘살바도르를 따르는 사례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실제 멕시코와 파라과이 징치권은 엘살바도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치적 마케팅에 불과' 평가절하 견해도
국제통화기금(IMF)은 10일(현지 시간)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하는 것은 많은 거시경제·금융·법적 이슈를 발생시킨다”며 엘살바도르의 결정을 비판했다.
우려의 목소리는 비트코인의 변동성이 지나치게 커 실제 화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고래’로 불리는 비트코인 대량 보유자들에 의해 가격이 통제될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경제 활성화 등의 목적에 맞춰 중앙은행이 공급량을 관리할 수 있는 달러화와 달리 비트코인은 발행량이 한정돼 있다.
포퓰리스트이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 부켈레 대통령을 직격하기도 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39세의 젊은 나이 덕분에 ‘밀레니얼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그가 ‘밀레니얼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래도 부켈레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화산 지열을 이용해 비트코인을 채굴할 것이라는 청사진까지 내놓았다. 세계가 엘살바도르의 경제 실험을 주시하고 있다.
/김연하 기자 yeon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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