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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 함께 모시는 사당에 신하 이름 붙여...제갈량의 충절을 기리다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19> 쓰촨성 청두의 제갈량 사당 ‘무후사’

中 유일 임금·신하 함께 모신 사당으로

유비 무덤도 있어 '한소열묘'로 불리다

5세기때 제갈량 사당 들어서며 이름 변경

현재 건물은 청나라 강희제때 중건한 것

15만㎡ 규모에 유적·민속·문화체험구 나눠

사당 앞 벽면엔 명문장 '출사표'도 새겨

청두 무후사에 모셔져 있는 제갈량 상.




중국 쓰촨성 청두에는 소설 삼국지의 전 세계 마니아에게 성지인 곳이 있다. 바로 청두 시내 한복판에 있는 ‘무후사(武候祠)’다. 삼국지의 주인공인 충무후(忠武候) 제갈량(181~234·제갈공명)의 사당이다.

이곳에는 삼국지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황제를 칭했던 유비(161~223)의 무덤과 사당도 있다. 당초에는 유비의 시호인 한소열제를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廟)라고 했다. 현재 입구의 현판도 그렇게 돼 있다. 하지만 승상으로 신하였던 제갈량이 더 유명해지면서 무후사라고 불리게 됐다. 중국인들의 제갈량에 대한 사랑이 절대적임을 알 수 있다.

청두 무후사(한소열묘)에 모셔져 있는 유비 상.


제갈량과 유비는 쓰촨성에서 세 번째 한나라(일반적으로는 쓰촨성을 의미하는 촉(蜀)을 붙인 ‘촉한’으로 불림)를 세웠고 결국 여기서 죽었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으로는 청두의 것이 중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유비는 손권이 세운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죽어가는 와중에 제갈량을 불러서 선택을 요구한다. “당신(제갈량)이 보기에 내 아들(유선)이 황제 자리에 맞으면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직접 황제가 돼라.” 그러자 깜짝 놀란 제갈량은 이마를 땅에 찧으며 “그럴 리는 없다”고 외친다. 일부에서는 유비의 말을 자신이 죽은 후 제갈량의 배신을 막는 고도 전략이라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제갈량이 딴 마음을 먹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는 정말 한 왕조의 부흥을 원했고 끝까지 충성과 절개를 지킨 모양이다. 지금까지도 상호 배신과 찬탈·학살이 난무하는 난세의 중국에서 드문 성격의 인물이다.

청두 무후사(한소열묘)에 모셔진 관우(왼쪽)와 장비 상


여전히 코로나19 와중이지만 무후사에는 늘 방문객이 몰린다고 한다. 삼국지 소설에 빠진 사람, 책을 보지 않더라도 유비와 제갈량을 아는 사람, 혹은 그냥 문화유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연중 붐빈다.

청두 무후사의 규모는 15만㎡로 전체는 역사 유적구, 민속구, 문화 체험구로 나뉜다. 사당은 역사 유적구에 속한다. 사당 구역은 크게 유비 사당, 제갈량 사당, 혜릉(유비 묘)으로 구분된다.



메인 건물이 유비이기는 하다. 유비전(殿)이라고 불리는 유비 사당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면류관을 쓰고 황금색 옷을 입은 유비의 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비 옆으로는 호형호제하던 관우와 장비의 상도 있다. 양쪽으로 이어진 동서 건물에는 당시 촉한의 문신들과 무신들의 상이 늘어서 있다. 40여 개의 이들 인물상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삼국지 소설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착각도 든다.

유비 옆으로 아들인 유선의 상이 작게 만들어져 있다. 유선의 시대에 촉한이 멸망했다는 것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의 얼굴이 다소 멍청하게 보이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유비전을 지나면 곧바로 제갈량전이 나온다. 제갈량전이 유비전보다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고대 건축은 중요 건물이 뒤쪽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제갈량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건물 한가운데는 트레이드 마크인 파초선을 든 제갈량이 단정히 앉아 있다. 옆자리는 그의 자식과 손자들이 장식하고 있다.

제갈량 사당 앞에는 ‘출사표’가 새겨진 돌이 있다. 출사표는 통일 전쟁을 위해 출전하면서 제갈량이 유선에게 바친 글이다. 명문장으로 그의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다. 현재 글자는 명나라 때 청두의 문인 백린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다. 오른쪽에서부터 읽다 보면 맨 마지막에 ‘악비’라는 서명이 있어 당황하기도 한다. 악비는 송나라 때 여진족과 싸운 민족 영웅이다. 백린이 술에 취해 글을 쓰다가 자신이 아닌 악비의 이름을 적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무후사를 나오면 서쪽으로 붉은색 담벼락이 이어져 이국적인 모양새다. 유비와 그의 두 부인이 함께 묻힌 혜릉이다. 붉은 담과 이 위로 무성하게 뻗은 나무들이 강렬한 대비를 준다. ‘인생 샷’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무후사 경내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제갈량 사당 앞의 한쪽 벽면에 그의 명문장 '출사표'가 새겨져 있다. 높은 학식과 함께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다.


제갈량이 삼국지로 유명세를 탔기 때문에 무후사도 중국 전체에 수십 군데가 존재하고 있다. 청두에도 무후사가 여러 곳이었다. 제갈량은 죽은 순간부터 신격화가 됐기 때문이다.

유비의 무덤·사당 옆에 현재의 제갈량 사당이 들어선 것은 서기 5세기 때라고 한다. 5세기는 중국에서 남북조시대라고 부르는 대혼란기다. 끊임없는 전쟁이 지친 청두 시민들은 유비와 제갈량이 군신 관계의 모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 두 사람의 사당을 만들었다.

이후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된 가운데 현재의 무후사는 1672년 청나라 강희제 때 중건한 것이다. 2008년 중국 국가1급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규모가 됐다. 한편 제갈량의 실제 무덤은 산시성 한중시 몐현의 정군산 아래에 있다. 그가 위나라를 향한 북벌 도중 사망한 곳이다.

/글·사진(청두)=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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