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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 안 나와 힘들었는데…함께라서 더 좋지" 임대주택 변신할 쪽방촌의 바람

서울시, 공공임대 제공 결정에

주민 "수십년 이웃 그대로" 환영

"주거환경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기존 공동체 유지도 필요" 지적

서울역 인근 남대문 쪽방촌 입구에 지난달 27일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김태영 기자




“아이고, 영수야! 목 괜찮아? 그러니까 유리를 왜 먹었어! 선생님 바로 불러줄까?”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역 인근 남대문 쪽방촌. 19개의 쪽방 건물이 ‘ㄱ’자 형태로 다닥다닥 기대 서 있는 쪽방촌 입구에 가을볕을 쬐러 나온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마을 중앙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통장 박명숙(가명) 씨는 여느 때처럼 주민들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는 쪽방촌이지만 이날은 술을 마시다 깨진 유리 조각을 실수로 먹은 김영수(가명) 씨가 말썽이었다. 김 씨가 목이 아픈 듯 말을 잇지 못하자 박 씨는 바로 옆 쪽방상담소에 있는 복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뒤 근처 구멍가게에서는 권용태(77) 씨가 놀러 온 한 할머니가 끓여준 커피를 익숙한 듯 받아들었다. 어린 시절 홀로 상경한 그의 첫 집은 남산 힐튼호텔 자리에 있던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이후 그의 삶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 집이 헐리면 근처 쪽방촌으로 이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권 씨는 “임대주택 입주권을 얻기도 했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나서 나 혼자인데 아는 사람도 없는 목동까지 가야 한다기에 안 갔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남대문 쪽방촌 일대 3,565.9㎡ 부지에 시행할 양동구역 제11·12지구 재개발 사업 조감도. 왼쪽 건물이 내년 착공 예정인 공공임대주택. /자료 제공=서울시


앞으로 권 씨가 삶의 터전을 잃고 또 다른 쪽방촌으로 옮기는 일은 더 이상 없을 전망이다. 서울시가 남대문 쪽방촌을 재개발하면서 사업 부지에 공공임대주택을 조성해 주민들에게 제공키로 했기 때문이다. 민간이 주도하는 쪽방촌 정비 사업에서 이 같은 이주 대책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민들의 기대감이 커져가는 가운데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호혜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임대주택이 지속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남대문로5가 580번지 일대 3,565.9㎡ 부지를 민간 재개발해 지상 22층 규모의 업무 시설, 공공임대주택 182가구, 사회복지시설을 조성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남대문 쪽방상담소가 있는 자리에 내년 하반기께 임대주택을 짓고 주민들을 먼저 이주시킨 후 쪽방촌을 철거해 업무 시설을 건립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초 서울 영등포·동자동 쪽방촌 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공재개발이 결정된 바 있지만 민간 재개발에서 시도되는 것은 처음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거주민들을 무조건 몰아내고 개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서울시와 사업자 사이에 형성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7일 찾은 남대문 쪽방촌의 한 쪽방 건물 모습. 쪽방이 들어서 있는 복도(위쪽 )와 세면장(아래쪽 사진)./김태영 기자


‘비주택 거처(쪽방·비닐하우스·고시원·컨테이너·찜질방 등)’로 분류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주민들은 환영 일색이다. 현재 남대문 쪽방촌에 있는 건물 19개의 평균 연한은 56년에 달한다. 화장실은 대부분 한 층에 하나씩 있다.

이곳에서 40년 넘게 살았다는 채 모(67) 씨는 “수급비에서 20만~35만 원 하는 방세를 내고 나면 쓸 돈이 없다”며 “여기 있는 사람들 사정이 다 딱한데 깨끗한 데라도 가서 남은 인생을 살면 조금이라도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봉 모(55) 씨도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겨울에는 상담소에 있는 샤워실이 아니면 세수도 하기 힘들다”며 “빨리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방문한 서울역 남대문 쪽방촌의 한 쪽방 건물 옥상. 쪽방 건물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다. /김태영 기자


주민들은 무엇보다도 “다 같이 옮겨 갈 수 있어서 좋다”고 입을 모았다. 채 씨는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며 “여기서는 다 알고 지내고 상담소에서 도움도 주는데 거기서는 외로워서 못 견디더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향후 임대주택을 설계할 때 쪽방촌의 특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주거 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아파트는 지금 쪽방촌보다 폐쇄적인 부분이 분명 있다”며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과 공동체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쪽방촌의 긍정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역시 향후 임대주택 설계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과 수요를 반영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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