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가 주도권 다툼을 벌여온 플랫폼 규제 법안이 결국 두 부처의 중복 규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영업 비밀 노출 우려가 있는 사항을 거래계약서에 의무 기재하도록 하는 독소 조항 등이 여전한데 협의해야 할 부처는 2개로 늘었다. 기업의 부담이 더 커지자 업계는 “규제를 없앤다더니 족쇄가 더해졌다”고 토로했다.
22일 공정위와 방통위가 최종 합의해 국회에 제출한 ‘온라인 플랫폼법 제정안 설명 자료’를 보면 주요 조항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협의한다’는 구절이 다수 포함됐다.
지난 1월 ‘온플법’을 발의한 공정위와 플랫폼이용자보호법을 추진해온 방통위는 플랫폼 주도권 싸움을 벌여왔다. 이에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4일 당정협의회를 마친 뒤 “수십 개에 달하던 중복 규제 조항이 대부분 정리됐다”며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무위와 과방위에서 각각 두 법의 입법을 추진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업계는 정부 여당이 마련한 합의안을 개악이라고 평가했다. 공정위 소관이었던 △규제 대상 사업자 기준(2조) △중개계약서 기재 사항(6조) △서면 실태 조사 조항(29조)에 과기부도 숟가락을 얹어서다. 당초 과잉 규제라는 비판을 받았던 조항에 중복 규제까지 더해지며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개거래계약서 서면 교부를 의무화한 6조가 대표적이다. 정부안은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 사항을 공정위가 정해 고시하도록 했는데 수정안은 과기부와 협의하도록 했다. 또 2조와 29조에도 과기부·방통위가 협의 대상자로 추가됐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 정도의 수정이면 법의 근간이 바뀐 것과 다름 없다"며 “두 부처가 공동으로 대통령령을 만들도록 하는 등 법리적으로 개악에 가까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의 갈등 끝에 여당이 조정한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제정안’이 나왔지만 플랫폼 업계는 오히려 최악의 결과가 현실화했다고 지적한다. 공정위와 방통위 법안의 핵심 독소 조항이 모두 포함된 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까지 협의 대상에 추가로 들어가면서 플랫폼 기업 입장에서는 불확실성만 더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규제 대상 사업자와 중개 계약서 기재 사항 등 주요 내용조차 확정되지 않아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당정이 마련한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제정안’에는 공정위의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 법안과 전혜숙 민주당 의원이 방통위 소관으로 발의한 플랫폼 이용자보호법 제정안의 독소 조항이 그대로 포함됐다. 기존 전 의원 법안에 있던 플랫폼 검색 결과 노출 기준 공개 조항이 대표적이다. 새 법안은 ‘거래되는 재화 또는 용역이 온라인 플랫폼에 노출되는 주요 순서, 주요 형태 및 주요 기준 등에 관해 과기정통부 장관과 협의해 공정위가 정하는 사항’을 공개하도록 규정했다.
업계에서는 ‘거래되는 재화 또는 용역’이 노출되는 방식을 중개 거래 계약서에 기재하도록 하는 내용에 가장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노출 순서나 형태·기준 등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영업 비밀인 알고리즘 작동 방식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법안은 ‘주요’와 ‘과기부와 협의’라는 단서를 달아 플랫폼 기업의 목소리를 반영한 듯 보이지만 업계 관계자는 “‘주요’의 의미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를 두고 여전히 불확실성이 많다”며 “정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그 범위가 넓어질 수도 있고 법 자체만으로는 모호해서 플랫폼 기업의 경쟁력 저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공정위 온플법 안의 독소 조항으로 꼽혔던 필수 기재 포함 계약서 교부 및 사전 통지 내용도 새 법안에 포함됐다. 플랫폼 기업은 서비스 제한·중지의 경우 7일 전, 계약 해지의 경우 30일 전에 입점 업체에 통지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플랫폼 기업에서 그나마 공정위의 온플법 안을 선호했던 것은 방통위 안의 검색 알고리즘 공개 조항 때문이었다”며 “기존 온플법에 검색 노출 결과 공개까지 포함된 제정안은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규제 부처인 공정위·방통위와 진흥 부처인 과기부 간 협의를 강조한 것은 법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공정위·방통위는 △규제 대상 사업자 규모를 정하는 기준 △중개 계약서 기재 사항 △서면 실태 조사 관련 사항 등을 모두 과기부와 협의해 결정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는 “규제 일변도로 가지 않고 시장의 의견을 충분히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도록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진흥 부처인 과기부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플랫폼 업계는 기존 법안에서보다 불확실성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 같으면 1개 부처만 설득하면 될 일을 이제는 2개 이상의 부처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며 “눈치도 2배지만 업무량도 2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러 부처가 함께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잡음이 이어질 수 있다. 최난설헌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처 간 통합 법안은 예측 가능성을 저하시키고 집행상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를 두고 공정위와 방통위 간 갈등에서 과기부가 최종 승자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약 1년간 이어진 공정위와 방통위의 싸움에서 과기부는 뒤늦게 끼어든 쪽이었기 때문이다. 임혜숙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플랫폼 산업을 담당할 주무 부처는 과기정통부가 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정책 조정 실패 책임을 플랫폼 업계가 떠안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과거에는 수시로 이뤄지는 ‘녹실회의’ 등을 통해 정책 추진 과정에서 부처 간 잡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으나 이번에는 공정위·방통위 간 갈등을 국회에서 해결한 꼴이 됐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애초에 법안이 이렇게 조정이 안 된 상태로 국회에 넘어오면 안 됐다”면서 “법안을 애매하게 합칠 것이 아니라 새 법을 만들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국내 플랫폼 관련 7개 협단체로 구성된 디지털경제연합은 “어떤 제도가 어떤 이유로 작동하기 어려운지 면밀히 분석한 근거 자료를 갖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과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면서 “기존 법률의 효과 분석도 내놓지 못한 채 새로운 규제만 필요하다고 하는 행태를 멈추고 엄정한 사전 입법 영향 분석을 실시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