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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물고기도, 인간도…다름만 있을 뿐 '우열'은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곰출판 펴냄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일대가 뒤틀렸다. 천장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지진으로 인한 붕괴와 뒤이은 폭발, 화재로 3,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을 때 스탠포드대학 총장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미친 듯이 어딘가를 향해 내달렸다. 그의 삶 자체였던 홉킨스 해변 연구소는 난장판이었다. 3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구해온 물고기 표본을 담은 유리단지들은 박살이 났고, 귀한 표본들의 살점이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그는 당시 세상이 인정하는 생물 분류학자였다. 물고기는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때까지 인류가 공식 확인한 어류 5종 중 1종은 조던이 알아낸 것이었다. 그토록 귀한 자료가 불과 47초 만에 엉망진창이 됐다. 어쩌면 산산조각 난 건 물고기 표본이 아니라 그의 인생인지도 몰랐다. 유약한 사람이라면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 도 있던 상황에서 조던은 차분하게 파괴된 잔해들을 훑어 본 후 바늘과 실을 가져왔다. 상하지 않은 물고기 표본을 추려내 이름표를 직접 꿰었고, 자신의 컬렉션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되살릴 수 없는 표본의 대체재를 찾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났다.

전체 어류 5종 중 1종 알아낸 조던

그릇된 자기 확신으로 '우열' 평가

우생학 주창…인종차별로 이어져

'어류' 또한 인간의 기준으로 분류

생명체 등급 나누는 것 자체에 경종

데이비드 스타 조던




젊은 과학 칼럼니스트 룰루 밀러는 조던의 이 같은 행동에 처음에는 경외감을 느꼈다. 스스로 나약한 인간이라 여겼던 밀러는 조던의 삶에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교훈적 요소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조던의 어떤 면이 거대한 혼돈과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됐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조던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섰다. 조던의 저서를 모두 읽었고, 그에 관한 기사, 평가 자료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아갈수록 밀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종국에는 분노했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빈틈 없는 삶,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삶이 오히려 그 자신을, 주변 사람들을, 더 나아가 세상을 망쳤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팩트와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자였던 조던이 우생학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

다만 밀러는 분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조던의 삶에서 일그러진 미국의 자화상을 읽어냈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밀러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던의 인생을 통해 인간의 그릇된 욕망과 오만, 편견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책의 구성은 다소 특이하다. 이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박제된 조던의 삶과 저자 자신의 삶을 오가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넌지시 제안한다.

어린 시절 조던은 조용히 들꽃을 관찰하던 아이였다. 방 한쪽 면에 채집한 식물 표본들을 전시하면서 분류 체계를 만들곤 했다. 들꽃에 대한 관심은 하늘의 별로 옮아 갔고, 동물학자 루이 아가시와의 만남을 계기로 물속 생명을 모두 생물 계통도로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굉장히 끈질긴 사람이었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결심한 목표는 반드시 이뤄내야 했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나아갔다. 어떤 면에선 요즘 유행하는 그릿(grit)이 매우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도한 자기 확신은 달리 표현하면 주변에 대한 무례가 된다. 특히 조던처럼 유명한 이의 자기 확신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가시처럼 생물학 분류 체계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다. 주관적 평가로 물고기의 우열을 평가했다. 이런 생각은 어느새 인간으로까지 확대 적용됐다. 인간에 우열이 있고, 유전에 부적합한 인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우생학이다. 이는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과 장애인·고아 등에 대한 불임 시술 등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인간은 물론 생명체를 등급화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 간에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생물 분류에 있어서도 다름은 있어도, 더 우등하거나 열등한 차이는 없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조던이 평생을 바쳤던 어류는 오늘날 분류 체계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는 있어도 어류는 인정될 수 없는데, 인간의 잣대에서 물 속의 생명체라는 이유 만으로 같은 부류로 묶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어류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오만함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밀러가 비판한 지점은 미국 사회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조던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 건물과 학교, 도로 등의 명칭은 오늘날 하나둘 교체되기 시작했다.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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