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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삼성은 왜 냉혹한 현실이 두렵다고 했을까

■ 서정명 산업부장

경쟁국 정부·국회 등 '반도체 스크럼'

투자 세액공제·보조금 지원 총공세

좌우이념·갈라치기 없이 국운 걸어

韓 반도체특별법은 '속 빈 강정'

정책 헛발질에 경쟁력 하락 우려





프로크루스테스는 어리석고 잔인하다. 강가에 여관을 지어놓고 여행객이 지나가면 만면에 미소를 띠며 감언이설로 꼬드긴다. 으슥한 밤이 되면 잔인한 본성이 드러난다. 여행객을 침대에 매어놓고 침대보다 키가 큰 사람은 큰 만큼 사지를 잘라 죽였다. 침대보다 작은 사람은 팔다리를 잡아당겨서 죽였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이 ‘절대 진리’라는 착각에 빠져 악행을 저질렀다. 결국 그는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에게 잡혀 자신이 해왔던 방식 그대로 처절한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이다.

세계가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국운(國運)이 달린 듯 정부와 의회·기업이 ‘반도체 스크럼’을 짜고 전방위 투자와 연구개발(R&D)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중국과의 통상 마찰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도체 지원법 ‘칩스 포 아메리카(CHIPS for America Act)’를 통해 미국 내 반도체 시설 투자에 최대 40% 세액공제를 하고, 반도체 인프라 투자에 500억 달러(약 56조 원)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자국 기업인 인텔은 물론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 등 반도체 산업을 호령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 추가 투자를 결행하는 이유다.

다른 국가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유럽연합(EU)은 생산 라인을 짓는 기업에 투자 금액의 최대 40%를 돌려주기로 했고, 일본은 반도체 공급망(GVC) 구축을 위해 보조금 지원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은 최대 10년간 소득세를 면제한다. 경쟁국들의 반도체 지원에는 좌우 이념이 없고, 대·중소기업 갈라치기가 없고, 기업·노조 이분법이 없다. 기업 경쟁력이 곧 국부(國富)라는 불변의 진실만 있을 뿐이다.



한국은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분야에서는 글로벌 톱이다. 파운드리(위탁 생산)와 설계 등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한창 뒤처진다. 문제는 정부와 국회의 안일한 현실 인식과 반기업 행태로 메모리마저 밑둥이 흔들리면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대며 국가핵심전략산업특별법(옛 반도체특별법)을 만들겠다고 떠벌렸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심사에만 1년가량이 걸리는 예비타당성조사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기업들의 목소리는 뭉개졌고, 산업 기반 시설 비용 지원도 강제 규정에서 재량 규정으로 바뀌었다.

반도체의 성패는 인재 육성과 공급에 달려 있는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령을 손질해 대학 정원 규제를 풀어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학들이 삼성전자·하이닉스 등과 협약을 맺고 정원 외로 학생 선발이 가능한 계약학과를 신설하는 것은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다. 해묵은 고질병을 수술하지 않고 반창고만 덕지덕지 붙여대서는 병들어가는 반도체 산업을 살릴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24일 미국 출장을 다녀온 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며 엄혹한 현실 경제를 토로했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전기차·배터리·조선·철강·석유화학·바이오 등 우리의 주력 산업이 모두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눈썹에 불똥이 떨어진 위급한 상황인데도 정부와 국회는 ‘기업은 불가촉 대상’이라는 라벨을 붙여 남의 일 보듯 한다.

반도체를 포함해 우리의 주력 산업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맥없이 놓여 있다. 오만 가지 뭉텅이 규제로 양팔을 잘라내고,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다리를 절단하고 있다. 기업이 힘들게 이끄는 ‘국부(國富) 수레’를 뒤에서 힘차게 밀어주는 경쟁국 정부와는 천양지차다. 물론 기업은 지고(至高)도 아니고, 지선(至善)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 전체에 도매금으로 ‘악덕 주홍글씨’를 새겨 ‘정책 딴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정책 헛발질에 우리 기업이 냉혹한 시장에서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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