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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 위기는 정치 이벤트가 아니다

정영현 문화부 차장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지구에 충돌하는 즉시 인류를 멸절시킬 엄청난 위력을 가진 혜성이다. ‘설마 비켜 가겠지’ 하는 기대는 헛되다.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충돌 예측값이 100%에 가깝다. 재앙은 자명한 현실이다. 그래도 대응할 시간이 몇 달 정도 남아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혜성 충돌 위기를 소재로 한 미국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이 다음 달 초 열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 4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다. 오스카 수상 가능성도 벌써 거론되고 있다. 대재앙을 소재로 한 영화지만 장르는 코미디다. 눈앞에 들이닥친 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인간들의 작태가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웃음이다. 실소에 가깝고 때때로 씁쓸하다. 뜨끔한 지점도 많다. 기시감 때문이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재앙은 정치판으로 끌려가는 순간 ‘물타기’나 지지율 제고를 위한 이벤트 재료로 전락한다. 여기에 ‘위대한 나라’ ‘숭고한 희생’ ‘더 나은 미래’ 등의 미사여구를 적당히 붙이면 재앙을 이용한 정치 쇼는 사뭇 거룩하고 장엄한 분위기까지 내며 여론의 감수성을 건드린다. 심각한 위기 앞에서 차가운 이성은 점점 떠밀려 나가고 질퍽한 감성이 빈자리를 채운다.



권력자는 위기가 다가옴을 알면서도 객관적 분석과 신속한 정보 공개, 정교한 대응책 마련보다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우선순위에 놓는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여론의 분열도 정치적 호재로 해석해버린다. 국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죽도록 서로 미워하는데도 상대보다 내 진영 지지율이 1%라도 높으면 그만이다. 필요한 경우엔 위기라는 팩트를 조금씩 발췌하거나 살짝 비틀어 경쟁자를 공격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위기의 정치적 재가공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그럴싸한 헛소리”라고 외쳐보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작지만 용기 있는 목소리들을 아주 쉽게 소거한다. 미디어를 이용해 이들의 호소를 희화화하거나 더 큰 관심거리를 내놓음으로써 세간의 주의력을 약화시킨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국 정치의 추한 면을 저격하지만 우리 현실과도 다를 바 없다. ‘미국’과 ‘혜성’을 ‘한국’과 ‘코로나19’로 치환해보자. 어색하지 않다. ‘코로나19’ 자리에 ‘인구 절벽’이나 ‘에너지 고갈’ ‘재정 위기’ ‘부동산 문제’ 등을 넣어봐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쇼도 하지 않는다. 냉정하고 정확하게 흐를 뿐이다.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사라진다.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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