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함은 결코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유난히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드라마 속 의과대학 99학번 동기들이 근무한 ‘율제병원’의 촬영지는 지난 2019년 서울시 강서구 마곡지구에 개원한 이화여대 의과대학 이대서울병원이다. 3층부터 지하 1층까지 내려다보이는 로비부터 카페·정원 등의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지하철 5호선 발산역이 병원과 곧장 연결된다. 8번 출구 엘리베이터 옆 난간에 길쭉한 당근 코가 디즈니 ‘겨울왕국’의 올라프를 꼭 닮은 눈사람이 서 있다. 눈덩이 3개로 만들어진 키 큰 눈사람이 허리를 숙여 내려다보는 시선 끄트머리에는 어린아이만 한 꼬마 눈사람이 오뚝 서 눈을 맞추고 있다. 아기 눈사람은 작은 눈덩이를 붙여 꼭 털모자처럼 만든 모자를 쓰고 있다. 독일 출신 4명의 작가가 결성한 아티스트 그룹이자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유쾌한 공공 미술로 유명한 잉어스 이데(Inges Idee)의 ‘스노우맨’이다. 스테인리스스틸로 제작돼 겨울이 다 가도 녹지 않는 눈사람이다. 이들의 눈 맞추는 모습에서 교감이 주는 따스한 행복이 느껴진다. 의료진이 환자를 살피는 눈길, 가족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가면 금빛 부리를 가진 점박이 새를 만나게 된다. 스페인 출신의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의 ‘희망 새(Hope Bird)’다. 한쪽 날개를 이마에 올린 모습이 방문객에게 경례하는 것 같으면서도 먼 곳을 내다보는 듯하다. 저 멀리서 다가올 희망을 찾는 모양이다. 차가울 뻔한 병원 건물은 유쾌한 작품들로 온기를 얻는다.
정문 앞에는 잭의 콩나무 같은 커다란 선인장 꽃이 솟아올랐다. 지하 1층의 흙에서 피어오른 12m 높이의 ‘자라나는 빛’. 유라시아를 누빈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유명한 조각가 정재철의 유작이다. 경기도 과천에 작업실을 두고 있던 작가 부부 정재철·황연주는 2016년 무렵 관악산의 갈현동 가루개마을 재개발로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식물들이 버려지는 것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은 일명 ‘식물구출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식물을 화분에 담아 옮기며 “언젠가 꼭 땅에 심으리라” 다짐했고 정 작가는 이를 ‘식물 프로젝트’로 발전시켰다. 작가는 2020년 암으로 세상을 등졌지만 지난해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유작전에서 ‘자라나는 빛’ 연작의 드로잉들이 전시됐다. 병원에 설치된 이 ‘자라나는 빛’은 작가의 어머니가 키우던 선인장 나무에서 착안한 것으로 생명력과 성장의 힘을 상쾌한 연두색 미감으로 보여준다.
이제 병원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생명의 고귀함이 밝게 빛나리니, 작가 김주현의 설치 작업 ‘생명의 그물-나선형’이 3층 높이로 트인 로비를 관통하며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예술을 감성과 정서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다. 김주현은 수학 개념과 과학 법칙을 근간으로 독특한 시각화를 이뤄내는 ‘다빈치형’ 작가다. 피보나치수열에서 탄생한 선은 성장하는 꽃이나 솔방울 같은 자연미를 그려내고, 비대칭 나선의 순환은 안과 밖이 교차하는 그물망 구조을 이루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반복의 묘미를 만든다. 작품은 작고 연약한 빛(LED) 알갱이가 자연의 질서에 따라 거대한 우주 공간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형태를 구현했고 이를 통해 상호 연관성과 사회적 가치까지 되새긴다.
1층 안내 데스크 뒤쪽으로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아치와 유리 피라미드가 보이고, 중앙 홀 계단 위에 올라선 ‘사모트라케의 니케’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잠시나마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 여행지 미술관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김홍식의 작품 ‘미술관의 산책자-루브르’ 연작이다. 세 점이 한 세트를 이루는데,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명작 앞에서 감상은 미뤄두고 휴대폰·카메라로 촬영하느라 바쁜 군중들이 혹시 나 자신은 아닐까. 작가는 흑백사진 이미지를 금속판에 새기는 판화 기법 ‘포토에칭’으로 작업했고 금색 실크스크린으로 채색해 작품 속 명작이 돋보이게 함으로써 예술의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김홍식과 김주현의 작품 중간 지점쯤, 검은 바탕 위로 직경 7㎝의 금속 구슬 수백 개가 알알이 붙어 있다. 가까이에서는 자칫 못 알아볼 수도 있으나 로비 홀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글씨를 구슬로 치환한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 고산금 작가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다. 기원전 4세기 이전에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원문을 그대로 적었더라도 읽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원본의 글자와 띄어쓰기에 맞춰 구슬을 배치한 일종의 추상 설치 작업을 통해 읽지 않고도 헤아릴 수 있는 그 깊은 의미를 공유하게 했다.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의술은 지금의 예술을 칭하는 ‘아트’로 불렸다.
이곳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지하 1층의 모습은 드라마 ‘슬의생’ 애청자라면 특히 익숙할 것이다. 계단 옆 휴게 공간과 지하 1층 벽면 등 3개의 대형 스크린으로 설치된 영상 작품은 세계적 작가 듀오 문경원·전준호의 협업작 ‘코스모그래픽(Cosmographic)’이다. ‘미지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이라는 주제로 예술의 역할을 질문했던 이들은 카셀도쿠멘타·베니스비엔날레 등에서 주목받았고 ‘MMCA현대차시리즈’ 후원 작가로 선정돼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전시가 한창이다. 8분 15초짜리 영상은 미지의 세계에서 출현한 신비한 존재가 세상에 자리 잡고 문명을 이루기까지의 신화적 내용을 풍경화 같은 평온한 장면, 시(詩) 같은 상징적 장면으로 그려 보인다. 지하 1층 로비에는 시퀸(스팽글)을 소재로 빛과 어둠, 안과 밖의 무한한 반복을 그리는 노상균의 ‘더블 엔드’, 지하 2층에는 옻칠의 깊고 오묘한 어둠 위에 다채로운 색의 변주, 보석들의 향연을 펼쳐 보인 채림의 ‘석양 무렵’ 등이 걸려 있다.
다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 전용관 ‘아트큐브’를 지나 의과대학으로 이어진다. 이곳 벽면을 채운 강애란 작가의 ‘책더미 속에 빛나는 의학서적’은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문학·예술·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눕혀져 있는 가운데 의대생의 필수 과목인 해부학·생리학·병리학·예방의학·내과학·외과학 등의 책만이 LED 텍스트로 빛나고 있다. 관념·제도·역사를 담은 ‘책’을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택한 강 작가는 정교한 LED 라이트박스 형태의 책을 만들어 전자시대 이후 책의 의미, 빛으로 여겨지는 책의 가치 등을 문명사적으로 풀어낸다. 이곳 의과대학 로비는 지성 주연의 SBS 드라마 ‘의사요한’ 등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의료진이 사는 곳이자 환자들이 살아나는 곳의 예술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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