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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자기만의 방'을 넘어 '우리 모두의 방'으로

작가

그토록 원하던 나만의 방 생겼지만

또 다른 결핍에 맞닥뜨린 우리들

홀로 고독할 수 있는 권리 넘어

연대의 공간 꿈꿔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여성들에게는 이제 예전보다 훨씬 많은 ‘자기만의 방’이 생겼다. 그런데도 왜 아직 자유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걸까. 왜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가졌음에도 아직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여성들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반드시 안정적인 생계 수단과 자신만의 공간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자기만의 방’이 처음 출간되었던 1929년, 그 시절에 비하면 여성들은 훨씬 많은 자유를 쟁취해냈다. 세계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뉴질랜드(1893)의 모범적 사례도 있지만, 여성들이 힘겨운 투쟁을 통해 가까스로 참정권을 얻어낸 영국의 사례는 ‘서프러제트’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으며, 2015년에야 여성참정권이 주어진 사우디아라비아도 있다.

정말 여성들에게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자기만의 방이 생겼지만, 왜 우리의 상상만큼 행복하지는 않은 걸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홀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해 연수입 500파운드 이상의 고정수입이 있어야만 한다고 선언했던 그 시대에 비하면, 우리는 엄청난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자기만의 방’일 때, 우리는 또 다른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이제 뭔가 생각하고 꿈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갖긴 했지만, ‘그 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답을 아직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만의 방을 넘어 자기를 넘어선 방을 꿈꿀 권리, 즉 홀로 고독할 권리를 넘어 연대하고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다채로운 축제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공간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강렬한 힌트를 남겨준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기만의 방’을 읽다가 버지니아 울프의 어조에 묻어 있는 어떤 안간힘과 조심스러움, 화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집요한 침착함을 읽어낸다. 셰익스피어처럼 위엄있게, 제인 오스틴처럼 냉정하게 말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울프의 모습은 ‘자기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냥, 버지니아 울프’라도 충분히 멋질 텐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녀의 자유를 짓눌렀던 아버지와 오빠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썼더라면 더 멋있었을 텐데. 그러나 과연 그렇게 완전히 순수한 자유로움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버지니아 울프가 슬픔과 우울과 절망 속에서 글을 썼던 것은 너무나 안타깝지만, 만약 그녀가 그 슬픔과 우울과 절망 때문에 정말로 글쓰기를 포기했다면? 그건 상상하기도 싫은 공포가 아닌가.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나혜석... 그 수많은 여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싸움을, 사랑을, 멈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실패와 성공의 잔해가 무한한 자양분이 된 창조의 토양 위에서 글을 읽고 쓰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투쟁을 멈추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침묵과 절망이 지금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커다란 혼란 속에서도 단 하나의 중심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그것은 바로 홀로 생각할 시간이다. 혼자 자유롭게 생각을 조립할 시간, 글을 쓰고 고치고 또 망치고 또 쓸 수 있는 그런 시간만 있으면,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찾을 수 있다. 나 자신으로서 사는 시간. 아직 우리는 목마르다. 더욱 뜨겁고 더욱 눈부시게, 창공을 향하여 날아오를 자유를 위해, 더 오랜 시간, 더 맑은 정신으로, ‘나 자신’으로 깨어있고 싶다. ‘자기만의 방’을 넘어 ‘우리 모두의 방들’이 연대할 수 있는 더욱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우리 여성들에게는 딸이며 아내이며 어머니일 시간을 벗어나, 내가 마음먹은 순간에는 언제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냥 나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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