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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사람 살리는 땅…무뎌진 마음도 살아났습니다

◆조선 '정감록' 중 최고 명당 영주 풍기

십승지서 첫번째 꼽은 소백산 자락

흉년·전염병 때마다 생존 위한 피난처로

소나무 어우러진 금선계곡 금선정에 황홀

소수서원·부석사선 고즈넉한 매력 풀풀

증기기관차 물대던 급수탑 가니 옛정취가

물길따라 외나무다리 잇는 내륙 섬마을

100년 넘은 전통 가옥들이 그때 그대로

부석사로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인 사천왕문에서 한 방문객이 범종각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사천왕문을 통과해 범종각과 안양루를 지나면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을 만날 수 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 첫머리, 소백산은 예로부터 생존을 위한 피난처였다. 조선의 학자 남사고는 예언서 ‘격암유록’에서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예찬했고,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백산이 태백산과 함께 ‘병란을 피하는 데 제일 좋은 곳’이라며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라고 극찬했다. 이 때문에 소백산 아래 작은 마을에는 전란과 흉년,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북 영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감록’에 십승지 중 첫 번째로 꼽힌 풍기 금계리 금선계곡에 자리한 정자 금선정. 금계 황준량이 평소 즐겨찾던 곳으로 사후 200년이 지난 뒤에 세워졌다.


‘사람도 살리는 땅’…십승지 중에 첫 번째 명당 풍기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전국 팔도에 십승지를 꼽았는데 첫 번째가 이곳 영주 풍기읍 금계리다. 정확히 말하면 금계리는 정감록이 쓰여진 조선 시대까지 영주와 분리돼 있던 풍기 땅이었다. 영주 여행의 출발도 풍기읍에서 시작된다. 소백산 죽령을 경계로 충북 단양 대강면과 맞닿아 있는 풍기는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부터 도솔봉·연화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금계리는 그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 금선계곡을 따라 금계바위 아래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왜 풍수지리 명당으로 꼽히는지는 금선계곡에서 답을 찾아볼 수 있다. 계곡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조선 시대 정자인 금선정(錦仙亭)이 여행자를 맞는다. 금선정은 1781년(정조 5년) 풍기군수 이한일이 건립한 정자다. 하지만 ‘금선정’이라는 이름은 그보다 200년이나 앞서 이곳의 경치에 반해 즐겨 찾던 조선 중기 문신 금계 황준량이 이름 붙인 바위 금선대(錦仙臺)에서 따왔다. 정자는 그 바위 위에 세워졌다.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도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 정자의 위치는 여행자의 눈으로 봐도 화룡점정의 명당 자리다.

기암절벽 위 금선정은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위치다. 팔각지붕을 얹은 금선정은 사방이 트인 작고 소박한 정자다. 주위로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아름드리 소나무 수십 그루가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이끼로 뒤덮인 크고 작은 바위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중심에 자리한 정자는 주변과 하나처럼 잘 어우러져 말 그대로 선경을 펼쳐낸다. 금계가 이곳을 극찬한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금계리에 세워진 십승지 표지석. 이곳이 ‘정감록’에서 꼽은 십승지 중 1승지, 천하 명당임을 알리고 있다.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 중턱에 선 것이 금양정사(錦陽精舍)다. 금계가 성주목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수행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지만 끝내 완성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은 금선계곡을 찾아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 금계를 그리워하며 제자들에게 금양정사의 관리를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금계의 후손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양정사에 퇴계와 금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금선계곡은 소백산자락길과도 이어진다. 소백산자락길은 영주·단양·영월·봉화를 잇는 소백산 둘레 143㎞를 12자락으로 나눈 생태 문화 탐방로다. 그중 2코스는 삼가주차장에서 소백산역(옛 희방사역)까지 이어지는 15.6㎞ 구간으로 금선정·금양정사뿐만 아니라 금선계곡을 따라 십승지 금계마을 구석구석을 거쳐간다. 단 풍기 읍내를 통과하는 코스 중간 이후부터는 시멘트 포장길을 통과해야 한다. 호젓한 시골길만 걷고 싶다면 풍기역까지만 갔다가 원점 회귀하면 된다.

전국 최대 규모인 풍기역 급수탑. 죽령을 넘나들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던 시설이지만 이제는 인삼을 알리는 광고판 역할을 하고 있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던 급수탑…풍기의 랜드마크로



풍기역 급수탑은 풍기 읍내 어디에서도 보이는 상징물이다. 풍기역은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중앙선을 지나는 모든 열차가 반드시 들러 쉬었다 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소백산맥 죽령을 힘겹게 넘어온 기차들은 풍기역에서 물을 보충해야만 남은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고갯길 운행을 앞둔 상행선 열차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풍기역 급수탑 물탱크는 전국 최대 규모로 세워졌다. 물탱크 규모만 50톤, 높이 30m로 일반 급수탑의 두 배에 달한다.

무량수전 석등 사이로 한자로 새긴 ‘무량수전’ 현판이 보인다.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고 기록돼 있다.


풍기역 광장 한쪽에 자리한 급수탑은 현재 풍기 인삼을 알리는 광고판 역할을 한다. 그 옆으로는 급수를 기다리던 증기기관차 두 량이 끊어진 선로 위에 서 있다. 역 주변으로는 풍기인삼시장이 있고 여기서 27번 버스를 타면 조선 초기 영주와 봉화 일대를 거느린 관아 순흥도호부 관아터를 지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부석사까지 갈 수 있다. 부석사야 언제 봐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맘때 가장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게 매력이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부석사 못지않은 영주의 대표 관광지로 떠올랐다.


시간을 거슬러 내륙의 섬마을로…아슬아슬 건너는 외나무다리



물길을 따라 영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수도리 무섬마을이다. 내성천 변 무섬마을은 금선계곡이 흘러 서천을 거쳐 내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수도리라는 지명은 마을의 생김새에서 따왔다. 물길이 둘러싼 마을이 마치 내륙에 자리한 섬과 같다는 뜻이다. 안동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와 비슷한 한반도 형상을 한 물돌이 마을이다.

마을 앞 내성천에는 전통 방식의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외나무다리는 1979년 콘크리트 다리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350여 년간 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졌지만 2005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복원하면서 지역 명물이 됐다. 물 위를 가르는 S자형 곡선의 다리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과거로 시계를 돌린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길이 100m 남짓의 외나무다리는 건너는 재미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수심이 낮아 물에 빠져봐야 신발이 젖는 정도이지만 막상 다리 위로 올라서면 평균대 위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놓은 다리는 성인 한 명이 서면 꽉 찰 정도로 폭이 좁고 다리 위로 끊임없이 사람이 오가기 때문에 잠시도 서 있을 여유가 없다.

물길은 마을의 시간도 멈춰 세웠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인 무섬마을에는 100년 넘은 전통 가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 때 100가구가 넘었지만 현재 40여 가구만 남아 있다. 해우당·만죽재 등 9개 가옥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가옥이다. 전통 가옥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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