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국방부 이전을 선언하면서 지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대통령이 모두 거쳐 간 ‘권부의 상징’ 청와대가 74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총독 관사터에 자리 잡은 후 서슬 퍼런 군부독재를 거치며 권위적이고 음습한 이미지를 쌓아 온 청와대는 민주화 이후에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내지 못한 채 역사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윤 당선인은 이날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발표하면서 “청와대는 국민보다는 대통령에 초점을 둔 권위주의의 잔재,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이라며 “국민과 단절되고 국민 위에 군림하며 소수의 참모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제왕적 대통령에서 일하는 대통령으로 국민과 참모, 민간 전문가와 소통하기 위해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집무실 이전을 강조한 윤 당선인의 설명처럼 청와대는 역사적 배경과 건물 구조 탓에 민심의 귀를 막고 대통령의 권위를 높인다는 비판에 직면해 왔다. 역사적으로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궁궐의 후원,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조선총독부의 총독관사, 미군정 시절에는 미군정 사령관의 관저로 사용되며 권부의 심장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해 ‘경무대’로 출발한 청와대도 다르지 않았다. 1960년 윤보선 전 대통령에 의해 경무대에서 명칭이 바뀐 청와대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을 떨게 했던 ‘1인 권력’의 상징이 됐고 민주화 이후에도 ‘왕수석’ ‘문고리 권력’ ‘십상시’ 논란을 촉발시키며 3권 분립의 취지를 흔든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25만 ㎡로 백악관에 비해 3.4배가 큰 압도적인 청와대의 부지와 건물 구조는 대통령의 상징적 권위를 높이고 대통령을 민심으로부터 고립시켜 왔다. 현재의 모습대로 청와대 본관과 관저를 확장 증축한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에는 1992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청와대를 보고 놀라며 “백악관과 맞바꾸자”고 말했을 정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취임한 뒤 본관에 도착해 “기수(김기수 수행실장)야, 사무실에 어떻게 가노”라고 물은 일화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식 뒤 집무실을 처음 보고 “테니스 쳐도 되겠구먼”이라고 말한 것은 비효율적이고 권위적인 청와대를 방증해 왔다.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사이의 거리가 도보로 약 15분이나 걸리는 청와대의 건물 배치 역시 소수의 인사만 대통령께 보고를 하는 수직적 구조를 강화해 왔다. 대표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를 책임지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조차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를 하지 못한다는 말까지 돌았다. 1초가 급박한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김장수 전 안보실장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지 못했고 “당시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추진해 왔지만 번번이 비용과 경호 문제로 인해 흐지부지돼 왔다.
물론 역대 대통령들도 청와대를 개방하는 등 권위적인 청와대를 탈피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 도로를 개방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와대 분수대 사진 촬영 허용,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청와대 앞길, 인왕산길, 북악산길을 열었다. 또 문 대통령은 본관이 아닌 비서관 근무동인 여민관에서 근무하며 대통령과 비서진의 업무 간 거리를 단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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