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은 독일 전쟁 범죄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일본 전범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도쿄전범재판을 각각 열었다. 두 재판이 있기 전까지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한 형사처벌은 없었다. 이후 전범 처벌을 위한 상설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세계 120여 개국은 199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모여 반인도 범죄 등을 처벌하기 위한 다자 조약인 로마 규정을 체결했다. 로마 규정 전문에는 ‘국제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인 가장 중대한 범죄는 처벌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로마 규정에 따라 2002년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중대한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개인을 소추해 처벌한다. 중대한 범죄란 집단살해죄, 인도에 관한 죄, 전쟁범죄, 침략 범죄 등 네 가지다. 유엔 사법 기구인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국가 간 법적 분쟁을 다루며 ICC는 범죄자 개인을 재판한다.
ICC는 로마 규정 가입국에 한해 재판권을 갖지만 비가입국이어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수사를 요구할 경우 관할권을 갖게 된다. 수단의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다르푸르의 학살’을 통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ICC는 2008년 기구 설립 이후 최초의 구속영장을 알바시르에 대해 발부했다. ICC는 2012년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에게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11가지 반인도주의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인정해 징역 50년 형을 선고했다. 2차 대전 이후 전직 국가수반이 국제 법정에서 처벌된 첫 사례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처벌하기 위해 ICC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외신이 보도했다. 미국은 가입국이 아닌 데다 ICC에 대한 정보 제공 등을 금지하는 법까지 제정했지만 가능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ICC에는 한계가 있다. ICC는 미국·중국·러시아·인도 등 강대국들의 미가입으로 ‘팔다리 없는 거인’이라는 조롱도 받는다. ICC 자체의 집행력도 없어 해당 국가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구속영장의 실효성이 없는 것도 문제다.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자를 법정에 세우려면 ICC의 위상을 높여 실질적 제재가 가능하도록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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