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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한국 증시에서 '테슬라' 탄생하려면

이혜진 증권부장

대출 중심 기업금융 발달한 日·유럽

美같은 혁신기업 성장스토리 없어

韓은 동학개미가 '미국의 길' 물꼬

주주 보호장치 마련…활력 이어가야





기업이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는 주식회사의 고안이 결정적이었다. 개인이 사업의 성패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는 구조에서는 모험을 꺼리게 된다. 한 번의 실패로 패가망신하게 되면 누가 새로운 시도를 하겠는가. 돈을 날리든 벌든 딱 지분율만큼만 책임지는 주식회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리스크 있는 사업에도 도전할 배포가 생겨났다. 될성부른 사업에 모이는 자본의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었다. 주식회사는 산업 발달의 첨병이 됐다. 그리고 주식회사의 지분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은 자본주의의 엔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엔진을 제대로 장착하지 못한 나라는 산업의 역동성이 떨어졌다. 장기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유럽과 일본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주식·채권시장 등 자본시장이 아닌 은행 대출이 기업금융의 중심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자본시장과 대출 시장의 규모를 보면 그 나라의 기업금융 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유럽 증시의 시가총액은 GDP 대비 68%에 불과하다. 반면 은행 대출(자산) 규모는 300%에 달한다. 미국은 정반대다. GDP 대비 시가총액은 170%이고 은행 대출은 85%다. 일본은 2020년 기준 GDP 대비 대출 규모가 171%, 시가총액은 129%다. 일본과 유럽 기업들은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이나 회사채 시장이 아닌 은행에 더 손을 벌린다는 얘기다.

유럽과 일본에서 미국의 테슬라 같은 혁신 기업의 성장 스토리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과 일본 증시 시가총액 상위에는 오래된 전통 제조업과 은행·통신사들이 버티고 있다. 은행가들은 돈을 떼이지 않을 안전한 회사, 당장 현금을 잘 버는 회사만 찾는다. 그러다 보니 대출 중심의 금융시장을 가진 나라에서는 신사업으로 흘러가는 자금의 물줄기가 약할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의 시총 상위 리스트에는 테슬라를 위시한 성장 기업들이 가득하다. 미국은 ‘모험 자본의 저수지’인 주식시장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가 일본이나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위험한 사기꾼과 담대한 사업가의 경계선에 있었던 그는 결국 기가팩토리를 지을 돈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여전히 대출 중심이기는 하지만 최근 상황이 바뀌고 있다. 증시 유동성이 풍부해지고 성장 기업들의 기업공개(IPO)가 대거 이뤄지면서 자본시장이라는 엔진이 출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반도체·배터리·인터넷·바이오·게임·엔터테인먼트 등 신사업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다. GDP 대비 시가총액 비중도 최근 몇 년간 증가하는 추세다. ‘메이드 인 코리아’ 유니콘 기업들도 속속 탄생하고 있다.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유니콘 수는 일본 4개, 한국 12개다.

이런 변화의 기저에는 동학개미 운동이 있다. 유럽의 가계는 쥐꼬리 이자에도 불구하고 자산의 40%를 은행 예금에 둔다. 미국의 가계는 자산의 10%만 저축하고 대신 401K라는 퇴직연금 제도를 통해 주식시장에 투자한다. 동학개미들이 예금과 부동산에만 쏠린 자산을 증시로 돌리기 시작한 것은 금융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경제가 ‘유럽·일본의 길’ 대신 ‘미국의 길’을 가도록 물꼬를 튼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반 주주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여론 달래기 이상의 경제적 의미가 있다. 대주주나 경영진, 기존 기관투자가들만 돈방석에 앉는 인수합병(M&A), 물적 분할, 지배구조 개편을 용인하지 않도록 서둘러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다. 기업들 역시 ‘구성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자회사 상장, 뻥튀기 공모가 등으로 당장은 자본 조달의 달달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개미들이 주주를 푸대접하는 ‘국장(국내 증시)’에 환멸을 느껴 해외로 떠날 때 황폐해진 증시의 쓴맛은 모두의 몫이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기업들에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저수지를 제공하는 ‘K증시’를 가꾸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국이 늙은 기업들의 나라가 아니라 테슬라처럼 펄떡펄떡 뛰어오르는 성장 기업의 나라가 되기까지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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