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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패션'에 담긴 격변의 시대

■패션, 근대를 만나다

변경희·아이다 유엔 웡 편저, 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

한중일 등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서

전통·서양의복 결합된 정체성 표현

일제치하 한국선 남성은 '양복' 입고

사적공간 머물던 여성은 '한복' 고수

이쾌대가 1940년대에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개인 소장. /서울경제DB




이쾌대의 자화상은 독특하다. 부리부리한 눈과 진지한 얘기를 꺼낼 것 같은 두툼한 입술 등 얼굴 때문만이 아니다.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옷차림이 기이하다. 일찍이 서양미술을 받아들인 선구적 화가에게 이 같은 복장은 근대적 정체성 그 자체였으리라.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복식이 근대화 과정에서 이처럼 전통 복장과 서양식 의복을 결합해 나타난 것을 뉴욕 패션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FIT) 미술사학과의 변경희 교수는 ‘하이브리드 패션(hybrid fashion)’이라고 부른다. 사회 엘리트 층과 문화 지도자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하이브리드’ 복식법이 자신들의 근대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니 이쾌대의 한 손에는 유화 팔레트가, 나머지 한 손에는 세필 붓이 들려있는 것 또한 서양과 동양의 공존이다.



국내외 학자들이 근대 아시아 패션에 관해 분석한 책 ‘패션, 근대를 만나다’가 출간됐다. 변 교수를 포함해 아이다 유엔 웡 브랜다이스대 미술학과 교수, 오사카베 요시노리 니혼대 사학과 교수, 메이 메이 라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 복식 담당 큐레이터 등 14명의 전문가가 글을 써 한 권에 묶었다. 옷차림이 달라지면 자세와 태도가 달라진다. 차림새를 유지하다보면 의식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변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19세기에는 만국박람회 개최와 서구식 외교 관례가 확립되면서 세계 각국이 서구의 복식을 자의 반 타의 반 도입하게 됐다”면서도 “한중일을 비롯한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서구 열강의 주도하에 추진된 ‘근대화’라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해 자주적으로 제도를 개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1930년대 인천의 한 모자상점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남성이 서양식 모자를 고르고 있다. /사진제공=사회평론아카데미




중국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복식 문화의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메이지 정부가 군대를 개혁하고 새로운 행정제도를 수립하면서 관리들에게 유럽식 맞춤 프록코트(신사용 대례복)를 입게 했다. 우리나라는 외세의 압력을 겪은 고종이 새로운 복식 도입을 근대화의 필수 요소로 봤다. 갑오개혁 이후 1895년에 단발령이 내려졌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국가 행사에 참석한 관리가 프록코트를 입는 것이 ‘필수’였다. 변 교수는 근대화 된 남성복이 ‘하이브리드 댄디즘’을 이뤘고 모직물 사용 증가까지 이끌었다고 짚었다. 사진이나 소설에 등장하는 이상, 박태원, 구본웅 같은 근대 지식인들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 한국의 결혼식 사진에서는 서양식 정장을 입은 신랑과 한복을 입은 신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여성이 서양식 의복을 입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사진제공=사회평론아카데미


1920년대 결혼식 등 기념사진을 보면 이처럼 ‘댄디한’ 근대 남성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여성은 대부분 한복 차림이다. 1907~1910년 순종과 순정효황후 초상사진이 그랬고, 1907년에 촬영된 윤치호의 가족사진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경우는 좀 다르다. 1889년 촬영된 사진에서 일본 쇼켄 왕후는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목걸이와 팔찌로 한껏 멋을 부렸다. 주경미 충남대 강사는 “남성은 양복, 여성은 전통복식을 입은 모습이 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지만 한국만의 특수성이 있다”면서 성별에 따른 복식 차이는 지배국 남성이 피지배국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보면서 “여성에게 낭만적 역할을 부여한 결과로 풀이해 온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국 상류층 여성의 한복 착용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존감과 정체성 유지를 위한 무언의 민족주의적 행동이자 소극적 능동성의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참신하다. 서양 복식의 확산 과정에 일제가 개입한 역사적 상황까지 따져보면, 한국 상류층 남성은 정치적 강요로 양복을 입어야 했으나 궁궐·가정 등 사적 공간에 머물렀던 상류층 여성은 전통적인 복식과 장신구 문화를 고수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1907~1901년께 촬영된 순종 황제와 순정효황후의 초상사진에서 황후는 전통 한복을 입고, 황제는 유럽식 복식을 차려입는 식으로 남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진제공=사회평론아카데미


장신구에서도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중화민국 시기 유행하던 여성용 부채에는 새롭게 등장한 사교계 여성의 정체성 고민이 녹아있고, 일본 종교 지도자나 타이완·홍콩 여성의 의복에는 격변하던 사회상이 담겨 있다. 학술서를 기본으로 했고, 600쪽 넘는 두께를 자랑하는 책이지만 주제별로 하나씩 나눠 읽으면 시대극 같은 흥미로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다. 2018년 영문으로 출간된 원제는 ‘근대 아시아의 패션에 나타난 정체성과 권력(Fashion, Identity, and Power in Modern Asia)’이다. 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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