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한 기고문을 통해 이번 전쟁의 결과로 초래될 파장을 생생하게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가 무분별한 군사행동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영토 확장의 야욕을 품은 다른 국가들에 그들 역시 무력으로 타국을 복속시킬 수 있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다른 평화로운 민주국가들의 생존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승리는 룰에 기반한 국제 질서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세계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영토 분쟁의 빗장을 열어젖힐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지난달 말 주요 외교정책에 대해 연설한 것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문제는 그의 연설이 중국에 집중됐다는 점이다. 진짜 놀라운 사실은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서 발생한 첫 번째 대형 지상전의 한복판에서 블링컨이 승전 전략을 제시하지 않고 아예 주제 자체를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워싱턴DC의 외교정책 기구는 우크라이나 위기 이전의 사고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의 발밑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지각변동이 일어난 사실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블링컨은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불구하고 룰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뒤흔들 최대 위협 세력은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라고 선언했다. 재커리 캐러벨이 지적하듯 이는 수십 년에 걸친 러시아의 무력행사 전력에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야만 나올 수 있는 결론이다. 러시아는 이전에도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고 이들 두 나라의 영토 일부를 합병했다. 시리아에 가차 없는 공습을 가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숨지게 했고,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던 체첸공화국 전역을 초토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서방 국가들에 암살단을 보내 정적들을 살해했고, 금전 공세와 사이버 공격으로 서방 민주국가들을 교란시켰으며, 가장 최근에는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이런 러시아에 비견할 만한 나라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블링컨의 연설 현장에는 2012년 대선 유세 때 미국의 가장 큰 단일 위협 세력으로 러시아를 꼽았던 밋 롬니(공화, 유타) 상원의원도 자리했다. 선거전 당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러시아의 국력을 근거로 그의 경고를 흘려보냈다. 그러나 롬니는 국제적 영역에서 파워란 국가적 역량과 의도의 혼합물로 측정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러시아는 새로 몸을 일으키는 굴기의 거인이 아니지만 미국과 유럽을 분열시키고 룰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찢어버리겠다는 결기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로 푸틴의 러시아는 세계 최악의 말썽꾼이다.
국력 쇠퇴를 겪는 국가가 지구촌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유례 없는 현상이 아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저물어가는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였다.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면서도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황혼의 제국은 남은 군사력을 이용해 국제 무대에서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미미한 속국이라고 깔보던 세르비아에 혹독한 교훈을 주기 위해 무력행사에 나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얘기 아닌가.
지금 미국의 최우선 순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는 개발도상국들에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한다. 러시아 제재 해제를 한목소리로 요구하면 이의 대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산 곡물을 전량 수출해 숱한 개발국들을 기아로부터 건져낼 것이라는 약속이다.
바로 지금 최선의 중국 견제 전략은 러시아를 패퇴시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야에 시진핑은 러시아를 강력히 지지하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만약 이번 무력충돌에서 러시아가 무력한 주변국으로 전락한다면 개인적으로 푸틴과 연합한 시진핑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반대로 푸틴이 멀쩡하게 생환한다면 시진핑과 중국은 위험한 교훈을 얻을 것이다. 즉 서구는 지속적인 공세에 맞서 룰에 기반한 시스템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믿음이다.
바이든 행정부 최고위 관리들 가운데 대다수는 러시아가 1차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크림반도를 합병했던 2014년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고위직으로 일했다. 당시 그들은 모스크바의 침략 행위를 되돌리거나 푸틴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지 못했다. 그때 그들은 이슬람 국가를 글로벌 질서의 최대 위협으로 보거나 아시아로 중심축을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우크라이나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두 번째 기회를 잡았지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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