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라며 시작하는 영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의 대표작 ‘황무지’. 무려 434행에 이르는 장편시이며, 단테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채로운 거장의 작품을 곳곳에 인용하고 일일이 각주까지 달아놓은 ‘대단한’ 걸작이다. 이 시는 삶과 죽음이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윤회사상부터 기독교 신비까지 인용돼 신앙에 대한 묵상으로 읽을 수 있으며, 세계대전 이후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인류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하지만 시인의 사적인 사연을 알면 좀 달리 보인다. 미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옥스포드 같은 최고의 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교류하던 엘리엇은 1915년 비비엔 헤이우드와 결혼했는데, 아내가 각종 신체적·정신적 문제가 있음을 뒤늦게 알았고 불행은 1933년의 결별로 마침표를 찍었다. ‘황무지’는 그 결혼생활 중이던 1922년에 발표됐다.
“'황무지'는 부분적으로 성적 불능에 관한 시다. ‘도시 관리자들의 배회하는 상속자들’에게 버림받은 젊은 여자들부터 릴과 앨버트, 그리고 릴이 ‘사산시키기 위해’ 먹는 알약들이 이를 말해준다.”
영문학의 거장인 존 캐리 옥스포드대학 명예교수는 고대의 서사시부터 현대시까지 관통하며 시 읽기의 즐거움을 속삭인 자신의 저서 ‘시의 역사’ 중 ‘모더니즘의 발명’이라는 장(章)에서 엘리엇의 시를 이같이 분석했다. 엘리엇이 “첫 결혼생활이 자신에게 ‘황무지가 나온 마음의 상태’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한 것이나 “여자와 성적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은 일화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난해한’ 시인 엘리엇은 귀와 상상을 풍부하게 자극하는 표현력의 천재성을 가졌으며 시의 ‘의미’는 덜 중요하다.
신간 ‘시의 역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시와 시인들의 뒷이야기를 망라한 책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쉽게 잊히지 않고, 시대를 초월해 계속 읽히는 고전들을 추렸다. 똑같은 시를 읽더라도 문학 거장의 시읽기에는 어떤 특별함이 담기는지 엿볼 수 있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났던 부분을 발견하는가 하면 시어 속에 교묘하게 감춰놓은 시대정신도 발굴해 낸다.
시는 역사와 동행한다. 점토판에 새겨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인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폭군에 대한 질책과 경고가 담겨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적 신앙이 투영된 시와 찬송가가 울려퍼졌고, 서정담시가 쓰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하나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에 대해 저자는 “단테만큼 현대 독자에게 호소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찾기 어렵다”면서 중세 신학에 젖어있는 그의 투철한 믿음이 현대인의 반감을 유발하는 점을 꼬집었다. 그럼에도 한 인간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내적 갈등에 대한 섬세한 묘사의 탁월한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런가하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사랑시가 넘쳐났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1609년에 출간한 152편의 소네트 시편이 대표적으로 꼽혔다. 시들은 하나같이 극적인 언어로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고, 위트와 관능성으로 읽는 이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18~19세기를 수 놓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들을 거쳐 20세기 초의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추앙받은 시인들은 과거의 형식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기자신과 혹은 평단과 싸워야했다. 17세기 말 영국의 권력기반이 흔들리는 와중에 엄격한 양식의 시를 고집한 드라이든과 포프는 신고전주의자로 불렸다. 낭만주의는 괴테에서 하이네, 독일의 릴케, 영국의 워즈워스와 블레이크 등의 개성 강한 시로 이어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세기 후반에는 상징주의 시인들이 득세했고 20세기 초반에는 기존질서에서 벗어나 개인의 정서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의 시대가 열렸다. 전문가의 명성이 주는 중압감, 책의 두께가 주는 부담감과는 달리 교양서로 쉽게 잘 읽힌다. 문학의 거장다운 자신있고 쉬운 문체가 읽는 이를 살뜰하게 돕기 때문이다.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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