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기후변화 대책이 당내 분열로 예산조차 확보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백악관이 ‘기후변화 비상사태’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의회 의결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 권한으로 기후변화 정책을 추진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비상 수단까지 동원하려 한다는 해석이 나오지만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에너지 위기가 극심한 상황에서 쉽사리 이 카드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중간선거 어젠다 고민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19일(현지 시간)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대통령이 기후변화 비상사태 선포를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백악관은 “논의 중인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면서도 “이번 주에는 선포 여부를 결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보였다. 당초 WP는 20일 바이든 대통령이 기후변화 대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파장을 고려한 백악관 측이 일단 한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국가비상사태는 전쟁·자연재해 같은 비상사태 때 행정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할 수 있는 조치다. 주로 안보·전쟁 관련 의제에 동원되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9년 국경 장벽 건설을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무려 136개 법률을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만큼 바이든 대통령이 기후변화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원유 수출 금지, 연안 석유 및 가스 시추 중단, 해외 화석연료 프로젝트 투자 제한 등 광범위한 조치를 단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부가 이 비상사태 카드까지 고려하는 것은 의회에서 기후변화 대책 예산 확보가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에 이어 2위인 미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겠다고 천명하고 기후변화 대책을 적극 추진해왔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 복지 확충 등에 수조 달러를 투자하는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최근 민주당 내 중도파인 조 맨친 상원의원이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하고 나서 제동이 걸렸다.
민주·공화당이 상원 의석을 양분한 상황에서 당내 분열로 입법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민주당 의원들과 기후변화 시민단체들은 대통령이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촉구해왔다.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에드 마키 민주당 상원의원은 비상사태 선포가 지지층 결집 효과를 낼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지지율 부진에 시달리는 바이든 행정부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결집 카드’로 비상사태 선포를 저울질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위기가 초래된 현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하더라도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비상사태를 선언하면 ‘비청정에너지’로 분류되는 석유·석탄을 규제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안 그래도 고공 행진하는 유가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 미국 주유소 휘발유의 전국 평균 가격은 지난달 11일 사상 처음으로 갤런당 5달러를 돌파하며 가계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최근 대법원이 환경보호청(EPA)의 온실가스 배출 규제 권한은 의회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판결로 의회의 손을 들어준 점도 정부로서는 부담스럽다. 바이든 대통령이 비상사태 선포라는 극약 처방으로도 별 효과를 내지 못할 경우 오히려 지지층 이탈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따라 백악관의 고민이 깊어지는 모양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행동을 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라며 백악관이 여러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부담이 큰 비상사태 선포 대신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 등 다른 방식으로 기후변화 대책을 추진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WP는 “바이든 대통령이 기후변화 대응과 ‘고유가’로 대표되는 경제적 현실 사이에서 어렵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기후변화에 대한 행정 조치를 취하더라도 법적 논란이 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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