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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떠나는 박혜준의 모험





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 분)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피지를 꿈꿨다. 모든 게 짜여지고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이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계획했다.

박혜준은 진짜 피지로 떠났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거기 살던 때를 떠올리면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물 공포증이 있었는데 거긴 온통 바다니까 자연스럽게 수영도 배우고….” 영어 배우고 골프 하기 좋다는 얘기에 아버지 박용 씨는 무남독녀 딸의 미래를 위해 피지행을 결심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두세 가정과 함께였다.

행복한 기억이었지만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휴양에 최고인 대신 선수를 목표로 골프를 하는 사람이 드물어 대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년 만에 피지 생활을 정리하고 아빠와 딸은 호주 골드코스트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5년 동안 골프가 쑥쑥 자랐다. 지금 박혜준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주목할 신인으로 다부지게 첫 시즌을 꾸려가고 있다.



“한국은 내 운명”

여자 골프 선수라면 누구나 그렇듯 박혜준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꿈꿨다. LPGA 2부 무대인 시메트라 투어(지금은 엡손 투어)부터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국행을 준비하던 때 미국 내 코로나19 상황이 워낙 심각했다. 호주 아마추어 무대는 이미 여러 대회를 우승한 뒤라 프로 무대 도전에 갈증이 크던 때였다. 박혜준은 결심했다. ‘미국 생각은 일단 접고 한국에서 프로에 도전해보자.’ 만 18세가 넘으면 프로 전향할 수 있다는 규정도 딱 맞아 떨어졌다. 박혜준은 지난해 3월 한국에 들어왔다. 두 달 뒤 생일이 지나 만 18세 자격도 갖췄다.

입국 후 KLPGA 투어 출전권을 따는 과정은 그야말로 초고속이었다. 3부인 점프 투어 시드전 예선부터 시작해 1부 투어 출전권이 걸린 시드전 본선을 통과하기까지 6개월밖에 안 걸렸다. 점프 투어 첫 출전 대회에서 2등을 하고 2부 드림 투어에서도 꾸준히 성적을 냈다. ‘지옥의 라운드’라는 1부 투어 시드전은 당당히 3위로 통과해 2022시즌 데뷔가 확정됐다.

“작년에 한국 들어올 때 ‘내년에 1부 투어 뛰자’ 마음먹고 오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바람이었지 진짜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스스로도 좀 놀라긴 했죠.” 박혜준은 “시드전에 대해 ‘너무 힘들다’ ‘골프계 수능이다’ ‘서울대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얘기를 들어서 치르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올라온 KLPGA 투어 1부 무대를 박혜준은 흠뻑 즐기고 있다. “올해 1부에 못 올라왔다면 살짝 후회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고 무엇보다 좋은 기업의 후원을 받으면서 TV로만 보던 언니들과 뛰니까 정말 잘 왔다 싶어요. 아직 친한 동료가 많지 않아서 어색한 것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경기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골프는 내 삶의 돌파구”

초등학교 2학년 때 골프를 시작했으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골프 인생이다.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중 호주에서 겪은 일들은 골프 인생과 골프 밖 인생에도 큰 디딤돌이 됐다.

호주 생활 초반에 박혜준은 말 못할 어려움을 겪었다. 그를 받아주려는 학교가 없었던 것. 그는 “면접을 통과해야 하는데 영어도 잘 못하고 어떤 식이든 증명이 안 된 사람이니까 선뜻 입학을 허가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저를 받아주면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증명해 보이겠다.’ 나이에 맞지 않는 절박한 포부에 겨우 한 곳에 합격했지만 학교 생활에는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낯선 한국인을 대화나 활동에 좀처럼 끼워주지 않았다. 인종차별로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참고 견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주어진 일에 더 몰두하는 것뿐. 박혜준에게는 그게 골프였다. 그렇게 쌓은 기량으로 꽤 이름 있는 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됐다. 그러자 ‘어셈블리’라고 하는, 우리로 치면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박혜준을 앞으로 불러냈다. 선생님은 박혜준의 우승 소식을 전한 뉴스를 다시 보여주면서 우리 학교의 자랑이라며 칭찬했다. “전교생 앞에 제가 소개되고 상도 주시고 그랬어요. 그 이후로 친구들이 다가오기 시작하더라고요. 먼저 인사를 건네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려고 하고….” 박혜준은 “그때 ‘골프를 잘하니까 애들이 끼워주기 시작하는구나. 더 편하게 지내려면 영어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마음 먹고 그렇게 했다”고 회상했다.

박혜준은 호주 유학 시절 36개 대회에 참가해 열 번을 우승했다. 톱 10에 들지 못한 것은 네 번뿐이었다. 하루에 10언더파를 친 적도 있고 연습 라운드에서 앨버트로스(기준 타수보다 3타 적게 홀아웃), 본 대회 때 홀인원을 했던 대회도 있다고 한다.





“웃어야지, 그럼 울까요?”

“왜 웃어요?” 최근 대회 중 박혜준은 한 갤러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굿 샷’을 하지 못했는데도 미소를 띠는 모습이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하거나 의아했던 모양이다. 박혜준은 “당황스러운 상황이긴 했지만 어떤 상황이든 잘 웃는 편인 건 사실이다. 안 좋았던 기억도 금세 잊어버리는 편이고. 골프 팬들한테도 잘 웃는 선수로 기억되면 좋겠다”면서 다시 웃었다. “골프라는 어려운 운동을 진정 즐길 줄 아는 선수, 매 대회 매 순간 1타에 웃고 울겠지만 이 운동의 매력을 맘껏 즐길 줄 아는 멋진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클럽은 드라이버다. 177㎝의 큰 키와 긴 팔다리를 이용해 260야드까지 날리는데 아웃 오브 바운즈(OB)도 거의 없이 정확하다. 스윙 스피드는 시속 105마일까지 찍힌다고. 박혜준은 “티샷 부담감이 없는 대신 코스 매니지먼트는 더 채워가야 한다. 아직은 양잔디가 편하고 한국 잔디는 낯설어서 산악 지형 코스에 대한 적응을 포함해 숙제가 많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거의 매주 이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스트레스 받지 않고 견뎌내는 것도 중요한 숙제다. “호주 선수들도 물론 잘 치지만 상대적으로 선수층이 두껍지 않아서 늘 잘하는 대여섯 명 중에서 우승자가 나왔거든요. 그런데 KLPGA 투어는 같은 스코어에도 몇십 명씩 몰리고 다들 잘 치니까 누가 우승할지 예측도 어려워요.” 박혜준은 이런 정글에서 이름을 알리고 경험을 쌓아 수년 뒤 다시 미국 무대를 노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물론 세계 랭킹 1위라는 원대한 목표도 가지고 있다.

정해 놓은 롤 모델은 따로 없다. 이 선배의 이 점을 본받으려 하고 저 선배의 저런 점을 본받으려 하는 식이다. 아빠 손을 잡고 갤러리로 대회를 구경 다니던 때는 신지애를 눈여겨봤다. “초록 잔디에서 경기 하는 게 멋져 보여서 저도 골프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최근엔 ‘좋은 스트로크에만 집중하라’는 임희정의 조언을 듣고 그린에서 쏠쏠한 효과를 보기도 했다.

돌아보면 박혜준은 아주 어릴 때부터 꿈이 확실했다. 엄마가 해외 출장지에서 애틋한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에 초등학교 1학년 박혜준은 이런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엄마, 그런데 나 LPGA 골퍼 될 거예요.’

오늘도 박혜준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조금씩 노를 저어가고 있다. 영화 속 트루먼이 그랬던 것처럼.

프로필

출생: 2003년

정규 투어 데뷔: 2022년

소속: 하나금융그룹

주요 경력:

2018년 호주 NSW 주니어 챔피언십 우승

2019년 호주 걸스 아마추어 우승

2020년 호주 그레그 노먼 주니어 마스터스 우승

2021년 솔라고 점프 투어 9차전 2위, 정규 투어 시드전 3위

2022년 KLPGA 챔피언십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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