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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지배층 무지와 약탈…조선의 山을 황폐화 시켰다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

전영우 지음, 조계종출판사 펴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에서 단시일에 40여척의 군선을 건조했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은 1804년 흑산도 유배지에서 쓴 ‘송정사의’에서 솔솦이 헐벗은 탓에 가난한 백성들이 비싼 관재(棺材) 값을 감당하지 못해 짚과 이엉으로 시신을 싸서 초장(草裝)을 치른다고 밝힌다. 울창했던 남부 지방의 산림은 어쩌다가 200여년만에 고갈됐을까.

70대의 노학자 전영우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명예교수가 쓴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는 지배계층의 인식 부족으로 사라져간 조선 후기 산림의 황폐사를 샅샅이 추적한다. 과거 숲의 생태사를 복원했다는 학술적 의미에다 선조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까지 준다. 또 조선 사대부 계급이 백성 수탈과 권력 유지에는 능숙했지만 국가 운영에는 얼마나 무능했는지 또 한번 절감하게 된다.

1910년 일제 조선총독부의 산림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체 산림 면적 가운데 32.3%만 숲이었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백두산과 개마고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조악한 어린나무로 구성됐거나 아예 나무가 없었다. 특히 인구 밀도가 높은 남부 지역의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저자는 조선시대 공식 기록몰은 물론 사대부의 문집과 낙향한 무신 노상추의 일기까지 뒤져가며 산림 파괴의 잔혹한 역사를 들여다본다. 일단 17~18세기 소빙기 혹한이 닥치면서 온돌 난방 시설이 확산됐고 땔감 수요도 급증했다. 더 큰 요인은 지배층의 무지와 약탈이었다. 조선 왕실과 병영, 권문세족들은 경쟁적으로 산의 나무를 남벌한 뒤 온돌과 소금가마용 땔감으로 판매해 이익을 얻었다. 벌채 후 재조림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제대로된 조림·양묘 기술조차 없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조성하며 인근에서 어린 나무를 캐내 옮겨 심었을 때 살아난 나무는 20%에 불과했다.

특히 소나무에 집착한 산림 정책, 즉 송정(松政)이 가장 큰 실패 원인이었다. 당시 기술을 천시하는 유교 이념 탓에 성능 좋은 철제 톱을 제작하는 전문 장인이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질이 단단한 활엽수종은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고 도끼나 자귀 등으로 쉽게 다듬을 수 있는 소나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또 사대부들의 권력욕은 북부 지방의 풍부한 산림 자원 이용도 가로막았다. 그들은 한양으로 내려오는 외적 침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며 도로 정비에 소극적이었고 상공업 발달을 촉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수레 보급도 막았다.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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