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단행한 수출규제의 완화를 검토 중이라는 현지 외신 보도가 전해지면서 한일 양국의 경제 관계 개선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2019년 일본의 보복 조치 이후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예산 투자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를 중심으로 대일 의존도를 낮추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산업구조가 밀착된 일본과의 협력 필요성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이후인 2019년 7월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한 데 이어 8월에는 한국을 일본의 ‘백색국가 명단(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품목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소재다. 수출규제 이후 한국은 해당 품목의 국산화를 꾸준히 추진해왔지만 녹록지 않았다.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100%에 가까웠던 대일 의존도가 50% 이하로 떨어지는 등 수입의존도는 줄었지만 일본 기업이 국내에 직접 공장을 짓는 방식으로 우회 수입하는 등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는 꾸준히 이어졌다. 실제로 한국의 대일 소부장 의존도는 2018년 18.2%에서 2022년 15.1%로 줄어든 반면 수입액은 같은 기간 381억 달러에서 394억 달러로 되레 늘었다. 소부장 사업을 이끌어갈 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여전히 높은 소부장 분야의 해외 의존도를 고려하면 완전한 기술 자립을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평가였다.
하지만 수출규제가 해제되고 백색국가에 다시 한국이 등재된다면 한층 우호적인 환경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시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는 “안보적 측면에서 반도체의 역할이 점차 늘어나고 공급망 문제가 경제 전반의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는 만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우리 경제의 리스크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기대했다.
미중 디커플링(탈동조화)가 본격화하고 세계경제가 블록화하는 점도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쿼드 등 경제안보협력체가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산업구조를 가진 한일 양국이 한목소리를 내면 영향력을 더욱 키울 수 있는 데다 공동 대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글로벌 통상 전쟁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입장이 비슷한 양국 간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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