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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에게해의 갈등과 엘리제의 화해

한일 정상회담으로 관계 복원 첫발

그리스·튀르키예 갈등 전철 밟지 않고

독일·프랑스 화해 모델 따라 가려면

日 성의로 우리 국민 납득할 여지 줘야





1998년 10월, 1차 세계대전 중 폰토스 지역을 비롯해 소아시아 일대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수십만 명이 오스만제국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대량 학살’로 규정하는 법령이 공포됐다. 튀르키예 정부는 근거 없는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당시 그리스인들의 파괴 행위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대량 학살의 역사를 둘러싼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에게해의 오랜 앙숙이다. 500년 넘게 침략과 대립의 역사가 켜켜이 쌓였으니 영유권 분쟁부터 역사 문제까지 불씨가 한둘이 아니다. 지진과 같은 상대국의 재난에는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햇볕이 드는 것은 잠시뿐이다. 양국 관계는 짧은 화해와 긴 갈등의 무한 루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유럽 내 원수지간이던 독일과 프랑스는 오늘날 둘도 없는 우방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두 나라를 일컬어 “하나의 몸에 깃든 두 개의 영혼”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특히 1963년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서명한 ‘엘리제 조약’은 적대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 협력의 시대를 여는 주춧돌이 됐다. 1958년 드골의 정중한 화해 제안으로 시작된 두 정상의 화해 노력은 수년간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공을 들인 끝에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한 생명력을 갖는 조약 체결로 결실을 맺었다.

해묵은 한일 갈등 해소를 과제로 안고 있는 한국에서는 독·프의 역사적 화해가 롤 모델로 거론된다. 16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12년 만에 한일 셔틀외교를 재개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엘리제 조약’에 버금가는 공동 선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한일 사이에서 독·프 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럽의 두 적대국이 지금처럼 긴밀히 연대하기까지는 독일의 끝없는 속죄와 반성에 토대를 둔 상호 이해와 역사 인식 공유, 끊임없는 교류 노력이 있었다. 엘리제 조약은 새 관계 구축의 출발점이 됐을 뿐이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한일 간 인식의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한일 양국은 독·프가 도달한 지점까지 많은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계묘늑약’ 등 과격한 언사를 동원해 국민들의 반일 정서를 부추기는 야권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입장에서 윤 대통령의 강제징용 해법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누가 봐도 한국 측에만 정치적 부담을 지우는 ‘반쪽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의 결단이 의미를 갖는 것은 한일 관계가 다시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메야 할 총대를 기꺼이 멘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사가 현재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하지만, 현재의 어긋난 관계 때문에 현안의 공유와 미래에 대한 담론이 사라지면 편협해진 시선은 더욱 과거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제 공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부담을 지는 관계가 지속되기는 힘들다. 해법의 남은 반쪽을 채우기 위해 일본이 새로운 사죄 발표와 전범 기업들의 배상기금 참여,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추진 중단 등 성의 있는 조치로 한국 정부와 신뢰를 쌓고 우리 국민들이 납득할 여지를 줘야 한다. 그래야 겨우 첫발을 뗀 양국 관계 복원의 발걸음을 계속할 수 있다. 기시다 총리가 끝내 정치적 부담을 회피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한일 관계의 비전을 발표해도 관계 개선의 동력은 이내 꺼져 버릴 것이다. 그 다음에 양국을 기다리는 것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사 갈등과 전략적 화해를 무한 반복하는 소모적인 무한 루프다.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길을 갈지, 프랑스와 독일의 길을 갈지, 한일 관계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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