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9월 국가정보원에 한 건의 첩보가 입수됐다. 국내 완성차업체 A사가 개발한 첨단 자율주행 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시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조사 결과 A사 연구원 B씨는 프로젝트 협업을 함께 한 협력회사 요청에 따라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기술’ 등 대규모 연구자료를 휴대전화기로 촬영해 유출했다. 또 이를 이용토록 전달하고, 본인은 해외 경쟁업체로 이직을 시도했다. B씨 행각은 국정원·검찰 수사 끝에 덜미를 잡혔고, 결국 그는 재판을 받을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법원은 2년 만인 2022년 7월 B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해외 산업기술유출 사건이 끊이지 않으면서 ‘법적 보호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최근 5년 내 산업기술유출로 인한 국내 기업 피해액(추산)는 25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게다가 산업기술 유출 사건 10건 가운데 8건이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자동차·정보통신·조선·전기전자 등 국가 핵심 산업에 집중되고 있으나 처벌 수위는 집행유예나 벌금 등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고 있다. 끊이지 않는 국외 산업기술 유출이 국가간 ‘기술 패권’ 경쟁에서 우리나라가 자칫 낙오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양형기준 현실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5년 새 25조원 피해…반도체·디스플레이 집중 ‘타겟’=26일 국정원에 따르면 산업기술유출로 국내 기업이 입은 피해 추산액은 25조에 이른다. 국정원이 이 기간 국내 산업기술유출 사건을 적발한 사례만도 93건에 달한다. 이들 산업기술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33건이 국가핵심기술이었다. 특히 이들 산업기술유출은 산업기술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2차전지·자동차·정보통신·조선 등 국가 핵심 분야에 집중됐다. 최근 5년 동안 산업기술 유출 피해가 가장 큰 분야는 반도체·디스플레이로 각각 24건, 20건에 달했다. 이들 산업기술 가운데에는 총 14건의 국가핵심기술이 포함됐다. 2차전지·자동차·정보통신 분야에서도 각각 7건의 산업기술이 유출됐다. 총 21건 가운데 국가핵심기술은 11건으로 절반에 달했다. 조선 분야의 경우 해외로 유출된 산업기술 가운데 단 1건을 제외하고 5건이 국가핵심기술이었다. 게다가 해외로 기술을 빼돌리려는 수법도 한층 진화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국내 연구이 해외 경쟁사로 옮기는 데 대한 법적 분쟁을 회피하려는 이른바 ‘징검다리 이직’마저 등장할 정도다. 이는 경쟁 회사가 기술적으로 연관이 없는 자회사 등에 국내 연구 인력을 취업시키는 방식이다. 위장 회사로 옮기게 한 뒤 실제로는 연구 인력으로 하여금 경쟁 회사에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중국이나 유럽 기업들이 해당 방식을 통해 전직 금지 가처분 소송 등 법적 조치는 물론 동종 업계 이직 금지에 따른 제재조차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회사 내에 조력자를 확보해 핵심 기술을 빼가거나 대기업 협력 회사에 대량 구매 등을 미끼로 접근, 기술이나 제품 샘플을 우회 확보하려는 시도마저 이어지고 있다. 또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리서치 전문 업체 등을 통해 핵심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거나 공동 연구를 빙자해 자국 연구원을 국내 대학·연구소에 파견, 기술 유출의 통로로 이용하기도 한다.
◇법정형 상향에도…양형기준은 6년째 제자리=문제는 반도체나 2차전지 등 기술 패권을 둘러싼 국가간 경쟁이 치열해지며 국내 산업기술을 자국으로 빼내려는 해외 경쟁 회사들의 시도가 줄을 잇고 있지만 처벌 수위는 ‘솜방망이’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경제가 2021~2022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 7개 사건의 1심 판결을 분석한 결과 실형 선고는 단 2건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징역 1년 6개월~2년으로 현행 양형 기준에도 크지 미치지 못했다.나머지 5건은 모두 집행유예였다. 법원은 각 사건의 양형 사유에서 ‘피해 회사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거나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산업기술 유출을 ‘피해 회사에 상당한 손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 행위일 뿐 아니라 시장 경쟁 질서에 위협을 가하고 새로운 R&D에 대한 동력을 상실시킬 수 있는 범죄’로 지적했다. 하지만 이들 사건 가운데 6건에서 ‘초범’이 감경 사유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또 반성한다(5건)거나 피해 회사 손해가 현실화됐는지 불분명하다(5건)는 점도 처벌 수위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백했다거나 가족들이 탄원서를 냈다는 등의 요인도 감형 사유로 반영됐다. 현재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양형 기준은 국내외의 경우 최고형이 각각 4년, 6년이다. 이는 일반·특수강도의 양형 기준인 최고 6년, 8년에도 미치지 못한다. 산업기술 유출과 절도는 유무형의 차이가 있을 뿐 무언가를 훔쳐 빼돌리기는 매한가지이나 처벌 수위는 천지 차이인 셈이다. 게다가 법정형 상향에도 영업비밀 침해 행위에 대한 양형기준은 6년째 그대로다. 부정경쟁방지법의 경우 2019년 1월 개정되면서 최고형이 징역 10년 이하에서 15년 이하로 높아졌다(제18조 1항). 산업기술보호법도 같은 해 8월 처벌 수위를 징역 15년 이하에서 3년 이상 유기징역(제36조 제1항)으로 변경했다. 양형위원회는 2021년 ‘양형 기준상 가중 영역의 상한이 법적형 상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기준 상향 등을 논의했으나 반영되지는 않았다. 2019년 개정된 산업기술유출법 제36조 제1항에 따라 유죄 판결된 사례가 없는 등 적용할 사건이 많지 않다는 게 양형위원회 전문위원들의 의견이었다. 실제 적용할 사건이 많지 않아 개정된 법률을 양형 기준에 반영할 필요성이 없다는 얘기다.
◇무너진 ‘법적 보호망’, 이제는 복구할 때=법조계 전문가들은 양형기준 현실화 등 법적 보호망 복구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끊이지 않은 산업기술유출 사건에도 법적 처벌 수위가 낮게 유지될 경우 ‘깨진 유리창 법칙’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수준의 처벌이 화이트칼라(샐러리맨,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산업기술 유출이 중범죄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함으로써 사건이 한층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양형기준을 한 단계 높이는 한편 초범이라도 엄히 처벌하는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산업계는 물론 법조계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 형사재판 절차상 피해자(기업)에게 기술 가치 등을 설명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현재 피해자는 증인 심문만 있을 뿐 기술 가치 등을 설명하거나 의견서를 제출할 수 없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 과정에서 기술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녔는지가 처벌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가 스스로 설명할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창원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피해자에 대해서는 증인 심문만 있을 뿐 기술의 가치나 중요성을 설명할 기회조차 형사소송법상 보장되지 않고 있다”며 “선고와 관련된 사실 외에 영업비밀이나 산업기술 판단 기준인 경제적 유용성과 관련해서는 의견서조차 제출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재승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산업기술 유출 사범들은 초범이라도 엄히 처벌할 수 있도록 양형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며 “재판 과정에서 기술 침해액을 산정하기 위한 전문 기관이나 감정관 등을 둬 실제 피해 액수를 정확히 산정하는 실무적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형사부의 경우 특허청에서 파견된 산업기술 수사 자문관 2명이 근무 중이나 특허법원을 제외한 각 지방법원 재판부에는 자문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나 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