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제약사들이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외부 리소스를 풀가동하고 있다. 성장 잠재력이 있다면 신약개발 기업은 물론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를 막론하고 공격적으로 기업 지분을 사들이며 사업 저변을 넓혀나가고 있다.
10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유한양행(000100)은 최근 다중표적 항체 기반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프로젠과 총 300억 원 규모의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기존 최대주주인 에스엘바이젠이 보유한 주식을 전량 넘겨 받고 향후 프로젠이 발행하는 신주 인수를 사들이는 조건이다. 오는 5월 지분인수 절차가 완료되면 유한양행은 프로젠 지분 38.9%를 보유한 단일 최대 주주로 올라선다.
양사는 지난해 9월 바이오 혁신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번 인수를 계기로 다중표적 항체 등 차세대 혁신 바이오신약 개발이 속도를 내고 국내외 파트너십 강화에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유한양행은 작년 말 기준 3000억 원에 육박하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 중이다. 풍부한 현금력은 국내외 유망 바이오벤처와 협력을 통해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을 확충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105억 원을 들여 인수한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개발 기업 에이투젠을 비롯해 온코마스터·휴이노에임·메디라마·전진바이오팜 등 국내외 기업 9곳에 231억 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단행했다.
유한양행은 최근 10년간 총 55개사에 5572억 원을 투자했다. 유한화학·유한메디카 등 자회사를 제외하고도 무려 7곳에 최대주주로 이름을 올린 상태다. 국산 신약 최초로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내는 글로벌 블록버스터 약물 후보로 꼽히는 항암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 역시 오픈이노베이션 전략이 결실을 거둔 대표 사례다.
녹십자(006280), 보령(003850), 대웅제약(069620) 등 과거 제네릭, 개량신약 판매에 주력하던 전통 제약사들도 최근 투자업계 큰 손으로 거듭나며 달라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녹십자그룹은 지주사인 녹십자홀딩스(005250)(GC)의 현금력을 지렛대 삼아 자회사의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는 중이다. 지난해 4월에는 GC, 지씨셀이 합쳐 900억 원 상당을 조달하며 미국의 세포유전자 치료제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바이오센트릭을 인수했다. 바이오센트릭은 뉴저지에 위치한 cGMP급 시설을 통해 세포·유전자치료제, 바이러스벡터 등을 위탁 생산해 왔다. 녹십자셀과 녹십자랩셀을 합병하며 CDMO 시장에 뛰어든 녹십자그룹 입장에서는 단숨에 글로벌 규모로 체급을 키울 수 있게 된 셈이다. GC는 지난해 바이오센트릭 인수 외에도 총 10곳에 824억 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단행했다.
보령은 지난해 8곳에 총 819억 원의 신규 투자금을 쏟아부었다. 미래 먹거리로 우주 헬스케어 사업을 지목한 만큼 민간 상업용 우주정거장을 건설 중인 미국 액시엄스페이스에 두차례에 걸쳐 6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최근 주주총회에서는 오는 5월까지 액시엄과 조인트벤처 설립을 완료하고 우주 헬스케어 관련 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예고했다. 대웅제약은 지난해 총 95억 원의 외부투자를 단행했다. 핀테라퓨틱스·베어리버·디시젠·시너지에이아이·메디아이오티·켈스·셀타스퀘어·에피바이오텍 등 새롭게 지분관계를 맺은 기업은 12곳에 이른다.
업계에서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바이오기업들이 안정적 실적을 올리는 전통제약사들의 지원으로 R&D 재원을 마련하면서 국내 제약바이오산업 생태계 발전으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바이오벤처의 한 관계자는 “국내 바이오기업들의 출구전략이 기술이전 또는 기업공개(IPO)에 치중되어 있다 보니 한계가 많았다”며 “제약바이오기업 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M&A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K바이오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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