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거의 싸우지도 못하고 나치 독일에 항복했다. 이탈리아·스페인은 나치 편이다. 소련은 나치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오히려 전쟁물자를 대주고 있다. 미국은 '바다 건너 불 구경’이다. 오직 영국만이 저항하고 있다. 1940년 6월의 일이다. 한때 전 세계 영토의 3분의 1을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에게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때 영국 수상에 윈스턴 처칠이 취임한다.
당시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곧 영국도 나치에 굴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처칠의 동료들 역시 나치와 협상해 그나마 남은 대영제국의 흔적을 챙기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처칠은 영국 국민들을 이끌고 나치의 사생결단 격전을 치른 후 결국 승리한다.
신간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는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의 최근 역작이다. 저자는 영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 영국사 최고 권위자로 불린다. 이번 책에서 그동안의 연구들을 집대성하면서 처칠의 리더십에 대해 분석한다. 저자는 “처칠은 역사적 통찰력의 리더십으로 서양 문명을 구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1940년 처칠은 갈림길에 있었다. 협상을 하게 되면 이는 히틀러의 나치가 전체 유럽을 지배하는 것을 묵인해주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고 나치를 무찌를 경우에도 ‘어부지리’로 소련이 유럽의 반을 차지할 가능성이 컸다. 가장 문제는 자국 국민들의 패배주의 의식이었다. 어쨌든 전쟁은 이겨야 한다. 처칠은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연설로 국민들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을 설득해 나간다.
다만 전쟁은 소련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동유럽을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처칠은 소련 독재 체제가 오래 못 갈 것으로 예상했다.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이 장기간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소련은 1991년 해체 수순을 밟는다.
저자는 처칠의 최고 업적은 1940년 나치를 상대로 영국 홀로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어 처칠의 리더십으로 3가지를 제시한다. 그는 “처칠은 첫째 조국을 지키는 것과 함께 인류문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또 어떤 위험과 위기에도 물러서지 않은 용기를 발휘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데 비겁하지 않고 정직했다”고 설명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의 리더라도 필요한 자질이다.
그리고 처칠은 탄탄한 역사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저자는 “처칠은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생각했으며 모든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봤다. 그런 통찰력이야 말로 처칠을 다른 지도자들과 구분해주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있는 한국에도 교훈을 준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처칠은 처음 수상이 되는 순간 자신이 ‘운명과 함께 걷고 있음(walking with destiny)’을 느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리더들도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을까.
책은 처칠과 한국전쟁에 대한 일화도 풀어낸다. 처칠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두 번째 수상이 된다. 처칠은 이 전쟁을 미국과의 동맹을 굳히는 방편으로 사용했다. 소련의 팽창에 맞서 나토 강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이 또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처칠의 리더십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2만 7000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