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벽에 놓인 세로 2.5m, 가로 1.9m의 거대한 캔버스. 멀리서 보면 그저 흰색 캔버스일 뿐, 이 안에 대체 어떤 그림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뜯어진 벽지처럼 ‘작품의 일부가 찢어져 있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작품에 가까워지면, 그때야 비로소 관람객은 ‘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설마 각 그리드마다 다 다른 색을 일일이 칠한 건가요?” 캔버스에는 수많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그리드(사각형)가 흐트러지지 않고 세로, 가로, 대각선으로 나열돼 있다. 그리고 각 그리드 틈 사이로 많게는 15가지 이상의 색이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리드 밑에 다른 색이 있는 것. 작품의 제작 과정을 들으면 더욱 놀란다. 먼저 캔버스 전체에 고령토를 4mm 두께로 바른다. 고령토가 완전히 마르면 칼로 수직·수평·대각선 방향으로 균열을 내 접는다. 균열을 낸 선은 구불구불하지 않고 올곧다. 또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90% 이상 일정하다. 균열을 낸 후에는 고령토를 일부 뜯어낸다. 뜯어내 캔버스만 남은 자리에 다시 물감을 채워 넣는다. 물감은 마르는 속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같은 색의 물감을 발라도 각 그리드 안의 색이 서로 다른 이유다. 이런 작업을 길게는 1년간 5~6회 반복하면 캔버스는 같은 색의 물감이지만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수백 ~ 수천 개의 그리드가 가득한 작품이 된다.
작가는 올해 91세의 정상화 화백. 가장 최근 작품이 2020년이라고 하니 작가보다는 ‘장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작가는 1세대 단색화 대표 주자로 한국 단색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에서 11억 원 대에 팔릴 정도로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2021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커다란 전시장을 혼자 채우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조수 한 명 없이 홀로 작업한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서울 삼청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무한한 숨결’이다. 작품만 보아도 전시의 제목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평론가 이일은 그의 작품을 ‘은밀한 숨결의 공간’이라고 말했는데 그 은밀한 숨결이 이제 고령의 작가에게 무한하게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작가는 “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했는데, 매일 똑같은 게 나왔다"며 “하나 뜯어내고 메우고, 또 뜯어내고 메우고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스러움이 바로 제 작품을 말해준다”며 자신의 작품을 회고했다.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제작한 40여 점의 작품이 공개됐다. 그 중에는 한지를 여러 겹 쌓아 미싱으로 꿰메고 그것을 한 겹씩 뜯어 밖으로 열거나, 안으로 접는 실험적 방식의 표현도 눈에 듼다. 제 아무리 열정을 가졌어도 이 작업이 작가에게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작가는 ‘사실 고달프다’며 제작의 고통을 토로했다. 3~4시간만 캔버스를 잡고 있으면 손에 든 도구가 툭 떨어진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다. 그는 “내 작품은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모두 봐줘야 한다”며 “오고 가는 것을 작가가 만들기 위해서는 전부 질서와 순서가 있다”고 말했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를 기성품을 생산하는 제품 생산자와 똑같이 볼 수 없는 이유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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