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은 한국 첨단산업 육성의 이정표를 세운 시기였다. 반도체·2차전지 등 첨단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이 담긴 첨단전략산업법 개정안 등 이른바 ‘K칩스법’이 국회에 처음으로 발의된 지 1년도 안 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정쟁으로 경제·민생 법안이 수년씩 표류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여야가 모처럼 이례적으로 호흡을 맞춘 결과다.
그러나 해당 법률 발의 이후 업황 둔화,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심화 등으로 국내 기업들의 제반 여건은 더 악화됐다. 특히 기술 유출 사건은 기업 존망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지만 미약한 처벌과 해외(국내 기업 등의 역외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유출에 대한 실효적 대책을 찾지 못하면서 시름이 깊어졌다. K칩스법이 제정되고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여야는 관련법 개정 작업에 속도를 올리는 모양새다.
2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6월부터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9건, 첨단전략산업법 개정안 4건 등 기술 유출 방지를 골자로 한 법안들이 대거 발의됐다. 이들 법안 중 국민의힘이 대표 발의한 법안이 4건,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법안은 9개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보완 법안을 내놓은 것이다. 법안들은 대한민국이 기술 우위를 가진 전략기술을 유출한 자에 대한 형량 및 배상 한도를 대폭 상향하고 핵심 기술의 국외 유출 입증 요건을 완화하는 등 재발 방지에 힘을 싣는다는 목적을 공유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입법 방향에는 대체로 찬성하고 있다. 다만 우리 기업과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K칩스법이 과도하게 기업들의 인수합병(M&A), 지식재산권(IP) 매각·인수, 인재 교류 등을 옥죄지 않도록 국회 상임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적용 대상과 요건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달 들어서는 유출자 단죄 중심의 기조에서 벗어나 기술 유출 예방에 초점을 맞춘 법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양향자 무소속 의원이 곧 발의할 예정인 일명 ‘K칩스법(반도체특별법) 시즌2’가 대표적이다. 법안은 전략기술 보유자가 외국 정부로부터 자료 제출이나 현장 조사를 요구받아 핵심 기술이 유출될 위험에 처할 경우 보호조치를 발동하도록 규정했다. 개정안은 한국 기업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해외 사업장에 대해 외국 정부가 민감한 요구를 할 때도 보호조치가 시행된다고 명시한다. 양향자 의원실 관계자는 “외국 정부로부터 기밀 공유 요청을 받을 때 기업들이 거절할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익과 직결된 기술의 중대성을 감안해 관련 사건을 별도로 전담하는 법원을 신설하는 방안도 언급된다. 양향자 의원은 기술법원 도입을 골자로 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검토 중이다. 또 국민의힘 측 산자중기위 간사인 김성원 의원은 전략기술 유출자에게 간첩죄에 준하는 형벌을 부과하는 내용의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이번 주 발의할 예정이다.
국내 투자를 늘리는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인프라 지원 등 당근을 강화하는 입법이 활발히 이뤄지는 것도 특징이다. 올 6월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산업계 주도의 인력 양성 시스템 마련을 골자로 한 ‘첨단산업인재혁신특별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4월에는 김병욱 민주당 의원이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긴 조세특례제한법 등의 법안을 내놓았다. 국가·지방자치단체가 상수도·가스 시설 등 기반시설 설치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지방 복귀 기업들에 대한 세금 감면 기간과 그 폭을 늘리는 내용이 담겼다.
양향자 의원의 ‘K칩스법 시즌2’에는 정부가 올해 처음으로 지정한 ‘국가첨단전략산업특화단지’를 기술 패권 확보의 전초지로 육성하기 위한 지원책이 대거 담길 예정이다. 공업용수·전력 등의 신속한 공급을 위해 특화단지와 인접한 지방자치단체까지 특별조정교부금을 우선 배부하고 용적률 한도를 현행 350%에서 450%까지 높이는 내용도 담긴다. 기업이 조성해야 했던 용수 처리, 변전소 등의 산업 기반시설을 국가·지자체가 직접 지원할 수 있는 근거 규정도 마련된다. 양향자 의원 측 관계자는 “올해 3월 정부가 첨단산업 관련 건물 용적률을 상향(350%→490%)하는 시행령을 처리했지만 정권 교체로 변경되는 일이 없게 법에 상향된 기준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 2024년 말 일몰을 앞둔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연구개발비,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특례 적용 기간을 2030년 말까지 늘리는 내용도 포함됐다. 양향자 의원은 21대 국회가 사실상 막을 내리는 내년 3월 말까지 ‘K칩스법 시즌2’ 입법을 끝낼 방침이다. 그는 “첨단산업 지원에 대한 여야의 컨센서스는 이뤄진 상황”이라며 “현장의 걸림돌을 제거해 기업들의 투자심리를 위축시키지 않으며 특화단지를 제대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