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버블 붕괴 이후 30년 넘게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 있던 일본 경제가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디플레이션 탈출의 첫 번째 열쇠인 임금이 꿈틀대고 정부도 세제·보조금을 동원해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엔저로 기업 실적이 개선되며 주요 주가지수는 1990년 이후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고 2분기 경제성장률은 우리나라를 앞지르는 등 실물경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첨단 반도체, 전기차 등 미래 신산업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인 가운데 미중 간 지정학적 갈등으로 중국으로 가던 글로벌 자금이 일본으로 몰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들썩이는 일본 경제를 각 부문별로 진단한다.
올 1월 4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임금 인상’을 한 해 최대 화두로 내세웠다. 기시다 총리는 “2023년은 일본 경제 선순환의 기초를 시작하는 해”라며 “임금 인상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30년간 기업 수익이 늘어나도 낙수 효과는 생기지 않았다”며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앞으로는 임금이 매년 늘어나는 구조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약 8개월이 흐른 지금, 일본 경제에는 그동안 보기 힘들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춘계 노사 협상에서는 재계와 노동계가 30년 만에 가장 높은 임금 인상률에 합의했다. 다만 고물가에 실질임금은 쉽게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 중소기업 세제 지원 등의 카드를 꺼내 들며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탈(脫)디플레이션’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1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중소기업의 임금 인상을 지원하는 세제를 최대 6년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중소기업이 직원의 임금 총액을 전년 대비 1.5% 이상 늘릴 경우 증가한 급여의 15%만큼을 법인세에서 빼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전체 고용의 약 70%를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임금 인상이 전체 임금 인상의 핵심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제도는 당초 올해 말 일몰될 예정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내년 세제 개정안에도 이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임금 인상에 적극적인 중소기업에는 설비투자 보조금도 추가로 지급할 방침이다. 닛케이는 “세제와 보조금의 두 바퀴로 임금 인상이 지속되는 환경을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31일 정부 회의에서는 2030년대 중반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1500엔(약 1만 3500원)으로 올리겠다는 목표도 설정했다. 올해 일본의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평균 최저임금이 1004엔으로 결정돼 처음으로 1000엔을 넘은 가운데 상승 추세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올해 초 재계 단체인 게이단렌, 최대 노총인 렌고의 신년회에 모두 참석해 임금 인상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임금이 20년 넘게 정체돼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일본의 구매력평가(PPP) 기준 실질임금은 2000년 4만 1428달러에서 지난해 4만 1509달러로 늘어나는 데 그쳐 OECD 평균(5만 3416달러)을 밑돌았다. 같은 기간 한국의 실질임금이 3만 2243달러에서 4만 8922달러로 증가한 것과 비교해도 차이가 크다. 이처럼 오르지 않는 임금은 일본이 디플레이션의 수렁에서 탈출할 수 없는 주요 원인으로 꼽혀왔다. ‘임금 인상→소비 촉진 및 물가 상승→기업 실적 개선→추가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첫 단추가 매번 끼워지지 않았던 셈이다.
정부의 강력한 인상 드라이브에 기업들 사이에서도 본격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최대의 노조 렌고에 따르면 올해 춘투에서 기업들의 평균 임금 인상률은 3.58%로 1994년 이후 약 30년 만에 가장 높다. 유니클로는 올해 3월 직원의 연봉을 최대 40% 올렸으며 도요타자동차는 20년 만에 최대 임금 인상에 나섰다. 후지쓰·가와사키중공업·미쓰비시중공업·NEC·덴소 등이 모두 노조의 임금 인상안을 이의 없이 수용했다.
이에 시선은 일본 기업들이 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임금 인상을 단행할 것이냐에 모아지고 있다. 올해 6월 일본의 실질임금은 전년 대비 1.6% 감소해 예상치(-0.9%)를 밑돌았다. 명목임금은 같은 기간 2.3% 늘었으나 물가 상승률이 올 들어 꾸준히 3%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해 “소비자물가를 일본 중앙은행의 목표치인 2% 이상으로 유지하려면 3% 이상의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지속적인 임금 인상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많다. 고다마 유이치 메이지야스다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금의 임금 인상 추세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지 판단하려면 내년 춘투까지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쿄 쇼코리서치는 주요 기업들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올해 중소기업의 약 25%가 임금을 올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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