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9월 ‘가계부채 대응 방향’을 발표하면서 은행의 느슨한 대출 관행을 거론하자 은행권에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대출 장부를 뜯어보면 정책 모기지를 떠안아 늘어난 몫이 상당한데 되레 은행이 부채를 늘린 주범으로 몰리니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시중은행에서 여신 업무를 담당하는 한 인사는 “디딤돌이나 버팀목대출은 말 그대로 돈 안 되는 사업”이라면서 “정부가 시중 대출금리를 고려해 이차보전을 해주면 겨우 수지를 맞추는 장사지만 정부 사업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5일 서울경제신문이 입수한 디딤돌·버팀목대출 실적 자료에 따르면 가계대출이 증가세로 돌아선 4월부터 9월까지 은행의 관련 상품 신규 취급액은 15조 753억 원이다. 예년이었으면 정부 사업비로 집행했을 대출인데 올해는 4월부터 사업비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은행이 이를 맡아온 것이다. 같은 기간 늘어난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은 34조 4500억 원으로 은행 주담대 증가분의 절반가량이 디딤돌·버팀목대출이었으며 결국 은행 대출 중 절반가량은 정부 사업비가 제대로 책정되지 않은 탓에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올해 정부 사업비가 예년에 비해 빨리 소진된 것은 연초부터 집값 상승 기대감이 커지면서 디딤돌·버팀목대출을 찾는 사람이 늘어난 영향으로 보인다. 정부가 서울 강남·서초·송파·용산 등 4개 자치구를 제외한 모든 구역에 대해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을 해제한 여파다. 세금과 대출 규제가 대거 풀리자 집값이 다시 뛸 수 있다는 심리가 형성됐다.
주요 은행의 대출금리가 상승세를 탄 점도 정책 모기지 수요를 키운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로 KB국민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 하단은 5월 3.85%로 저점을 찍은 뒤 6월부터 4%대다. 반면 같은 기간 디딤돌대출 금리 하단은 2.15%로 시중 대출금리보다 2%포인트가량 낮다 보니 정책 모기지 신규 대출에 몰렸다는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집값 매수 심리를 부추기면서 전체 가계대출이 증가세로 돌아섰다”면서 “여기에 맞물려 정책 모기지 수요도 늘었고 은행권은 여기에 보조를 맞췄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은행의 이 같은 비판이 과도하다는 견해도 있다. 정책 모기지가 없었다면 은행 대출을 찾는 수요가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집값 상승기에는 정책 모기지나 은행 대출이 전반적으로 늘 수밖에 없는데 정책 모기지 덕에 차주의 원리금 부담을 그나마 덜어줄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가 은행에 디딤돌·버팀목대출 집행을 맡겨뒀지만 갈수록 커지는 이차보전액은 고민거리다. 은행이 정책 모기지를 대신 취급하면 정부는 정책 모기지와 시중금리 차이를 감안해 차액을 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 예산정책처 등에 따르면 국토교통부의 주택도시기금을 통한 이차보전 사업(디딤돌대출·버팀목대출·주택금융공사 유동화 취급분 등) 규모는 올해 1조 95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4982억 원보다 갑절 이상 늘어난 규모다. 기금 이차보전 규모는 2020년 2615억 원을 기록한 뒤 매해 1000억 원가량씩 늘었는데 디딤돌·버팀목대출 수요가 커지면서 올 들어 급증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차보전 규모가 당분간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집값 상승 기대가 좀체 꺾이지 않는 가운데 시중 대출금리를 좌우하는 은행의 조달비용도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보전액을 관리하려면 정책금리라도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 경우 서민 부담이 가중될 수 있어 정부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게다가 이차보전으로 투입되는 재원은 회수가 불가능하다. 정부가 기금을 통해 직접 대출을 내주면 융자 원금에 이자를 돌려받는 식으로 선순환이 가능하지만 이차보전의 경우 사업비가 일회성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산정책처는 “시중금리와 정책금리의 차이가 확대되거나 시중금리가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주택도시기금의 재정 건전성에 미치는 영향도 당초 계획 대비 커질 수 있다”면서 “투입되는 재원은 회수가 불가능하나 그 규모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적정 규모를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