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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번 투자한 고객도 면죄부…은행 "예적금 외 자산관리 수단 막혀"

■홍콩 ELS 손실 배상…'투자자 자기책임 원칙' 희석 논란

손실 고객 대부분 재투자자 불구

'21번 이상'부터 배상비율 차감

DLF 이어 판매사 책임전가 반복

은행들 비이자이익 확대 급제동





금융감독원이 11일 발표한 분쟁 조정 기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최대 배상액을 100%로 설정한 점이다. ‘라임펀드’나 ‘옵티머스펀드’와 같은 사기 상품 판매 사례를 제외하면 금감원이 손실 전액 배상 가능성을 언급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은행이 귀도 잘 안 들리는 79세 치매 노인에게 파생결합펀드(DLF)를 팔았을 때도 금감원은 ‘투자자 책임’을 이유로 80%의 손실만 보전하라고 했다. 이번 배상안에 따르면 예적금을 목적으로 은행을 찾았던 80세 이상의 노인이 주가연계증권(ELS)에 처음 가입한 경우 손실 전액 수준을 보전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날 배상안을 발표하면서 “이번 분쟁 조정 기준은 DLF나 사모펀드 사태 등 과거 사례를 참고하되 ELS 상품 판매 및 투자 행태를 고려해 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설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당국이 투자자 책임을 판매사에 전가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책은행의 은행장을 지낸 한 인사는 “분쟁 조정안의 토대가 되는 검사에만 수개월이 걸리는데 검사에 돌입한 지 두 달여 만에 조정안을 내놓은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면서 “정부가 나서서 손실을 만회해주는 일이 반복되면 투자자의 당국 의존 성향은 짙어질 수밖에 없고 금융사는 탈이 안 나는 예적금 상품에만 발목 잡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1일 서울 영등포구 금감원에서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관련 분쟁 조정 기준안을 발표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전문가들이 이번 조정안에서 가장 큰 문제로 보는 지점은 과거 ELS에 가입했던 상당수 투자자에게도 손실을 보전해주기로 한 것이다. 당국은 재투자자의 경우 배상 비율을 차감하겠다면서도 그 기준점을 ‘투자 경험 21회’로 잡았다. 당국의 지침대로라면 20회 ELS에 가입했더라도 ELS 상품에 익숙하지 않은 투자자로 분류된다. 기준치만 넘지 않는다면 과거 투자 때 녹인 구간(knock-in·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수준)에 진입해 상품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했을 투자자 역시 일종의 ‘면죄부’를 받게 됐다.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인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홍콩H지수 ELS의 경우 재투자자가 대부분”이라면서 “판매사의 설명을 못 들었다며 불완전판매로 규정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꼬집었다.

은행의 비이자이익 확대 의지도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손실에 대비해 원금을 100% 보장하는 예적금 상품에만 얽매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국은 이번 검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은행이 ELS 판매 실적을 성과평가지표(KPI)에 연동해 불완전판매를 조직적으로 조장했다’고 했지만 상당수 은행의 KPI는 ELS만이 아닌 전체 비이자이익 판매 실적과 연계돼 있다.



당국이 그간 비이자이익을 늘릴 것을 주문해놓고 문제가 생기면 오롯이 은행에 부담을 지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국은 한발 더 나아가 주요 판매사를 제재하고 ELS 등 고위험 상품을 은행에서 판매하지 못하게 하는 안까지 검토하기로 했다. 이세훈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구체적인 제재 범위와 수준은 관련 법규와 절차에 따라 추후 결정될 것”이라면서 “과징금 부과 여부 및 수준 결정 시 배상 등 사후 수습 노력을 보이면 제재 양정 시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국내 은행이 이익의 93%를 이자수익을 통해 확보하고 있어 비이자이익을 늘리라고 했는데, 이런 사태가 생기면 책임을 은행에 지우다 보니 은행은 조심할 수밖에 없다”면서 “서로 충돌하는 정책들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당국이 금융사의 위법행위를 재단한 근거가 부적절하다는 비판 또한 나온다. 당국이 은행의 불완전판매 행위를 문제 삼으면서 꺼낸 금융소비자보호법은 2021년 3월 도입됐다. 금소법은 금융 상품 판매사가 소비자 투자 성향 등에 적합한 상품을 권유해야 하는 내용의 적합성 원칙을 담고 있다. 문제는 금융사가 적합성 원칙을 지키지 않았더라도 금소법 시행 이전에 가입했다면 위법으로 몰아붙일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위법행위로 규정하지 못하면 배상 수준 역시 상대적으로 낮아야 하는데 당국이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ELS 만기가 통상 3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2021년 1~2월 가입자들에 대한 배상액은 3월 이후 가입자보다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논의에 관여한 한 인사는 “금융사의 판매 행태가 적법한지를 따지려면 판매 당시 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같은 행위를 했더라도 어느 시점에 이뤄졌는지에 따라 위법 여부가 갈릴 수 있다”고 전했다.

/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 신중섭 기자 jseop@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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