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사이언스(008930) 주주총회에서 장·차남 임종윤·종훈 형제가 승리해 한미약품그룹과 OCI(456040)그룹의 통합이 무산됐지만, 남아있는 상속세 2644억 원은 한미 오너 일가의 숙제다. 다음 달부터 주식담보대출 만기가 줄줄이 돌아오는 상황에서 상속세 재원 추가 마련을 위해 국내외 사모펀드(PEF) 등으로부터 대형 투자 유치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형제 측의 계획대로 1조 원의 펀딩을 받더라도 이를 상속세 재원으로 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29일 제약·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한미 오너 일가가 회사에 투자를 유치하면서 본인들의 일정 지분까지 묶어 매각하게 될지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상속세를 해결해주면서 경영권까지 확실하게 확보할 전략을 마련해 오는 외부 투자자와 손잡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미그룹의 경우 신약 개발을 위해 1조 원의 펀딩 자체는 충분히 가능할 수 있으나, 이 자금을 상속세에 쓸 수는 없다.
현재 시장에서는 글로벌 사모펀드(PEF) 베인캐피탈 등이 거론된다. 베인캐피탈은 그간 화장품을 비롯해 뷰티 의료기기 투자로 두각을 보여왔다. 보툴리눔톡신(보톡스) 제조사인 휴젤을 GS컨소시엄에 1조5000억 원에 매각하면서 투자금을 성공적으로 회수했고, 화장품 브랜드 AHC를 보유한 카버코리아를 인수한 뒤 유니레버에 지분을 되팔았다. 또 지난 2022년에는 미용 의료기기 전문 기업 클래시스 지분 60.84%를 6700억 원에 샀고, 지난해 볼트온(동종 업체 인수로 기업가치 상승) 전략으로 이루다도 인수했다. 업계 관계자는 “베인캐피탈은 바이오 분야에 전문성이 있고, 해외에서도 관련 딜을 해 우호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베인캐피탈을 비롯해 대형 글로벌 사모펀드들은 경영권이 확보된 바이아웃 딜에 주로 투자한다는 점에서 성사가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 형제 측에서 본격적인 경영활동에 나설 경우 국내 PE들이 일부 지분 투자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은 1조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형제의 계획에 대해 “장남과 차남은 OCI와의 통합을 저지한 후 일정 기간 경영권을 보장해 준다는 해외 자본에 지분을 매각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모녀 측은 지난해 IMM인베스트먼트 등에 투자 유치를 제안했으나, 일가 모두의 결합된 안이 아니면 어렵다는 답변만 들어야 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주요 주주간 협의 없이 경영권 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금 투입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앞서 라데팡스로부터 투자 유치를 추진하다 무산됐고, 이번에 OCI와 통합까지 추진했던 배경도 자금 조달을 통해 2775억 원을 상속세 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모녀측은 며칠 전 증권사를 찾아 직접 투자설명회(IR)을 할 정도로 승리를 자신했었다.
이는 오너 일가가 고 임성기 회장이 타계하면서 고지된 총 5321억 원의 상속세 중 절반 가량을 냈지만 자금 여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배경에 기인한다. 송 회장과 장녀인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의 잔여 상속세는 각각 1229억 원과 473억 원이다. 장·차남 임종윤·종훈 형제 역시 각각 683억 원과 259억 원이 남아있는 상태다. 납부기한은 내년까지이다.
이들은 본인 명의 주식을 담보로 농협은행, 하나은행, 교보증권, NH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신한투자증권, 한국증권금융 등 여러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았다. 모녀측의 담보대출 총액은 현재 2630억 원, 형제측은 2749억 원인 상황이어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과 담보인정비율(LTV)로 인해 추가 대출 한도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주담대가 다음달부터 줄줄이 만기가 찾아와 연장이 필수적이다. 송 회장 측은 5월 이내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액이 총 2224억 원, 형제 측은 1110억 원에 이른다. 특히 송 회장 측의 경우 경영권을 잃게 되면서 향후 배당금 만으로 이자재원을 충당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형제 측 관계자는 “가족 간에 협의를 해서 대안을 더 찾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만약 주총에서 모녀가 승리했다면 4월 30일 OCI가 2400억 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자금을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없던 일이 됐다. OCI 관계자는 “통합 절차가 모두 중단돼 절차에 맞게 다시 공시를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수는 한번 금이 간 모녀와 형제가 다시 손을 잡을 지 여부다. 송 회장 측 지분은 35.0%, 형제 측은 28.42%를 보유하고 있다. 주식 유통 물량이 많지 않은 데다 팽팽한 지분 구조를 고려하면 제3의 우호 지분 확보 여부에 따라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때문에 형제 측에서 외부 투자자와 협력해 공개매수를 통해 과반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이번 주총에서는 모녀가 상속세 문제로 회사를 팔아넘겼다는 소액주주(4.5%)들의 불만이 힘이 됐지만,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12.15%)과 국민연금(7.66%)이 앞으로도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모녀쪽은 시장에서 블록딜을 추진해 형제와 다른 길을 가는 선택도 남아있다. 업계 관계자는 “경영권을 가진 형제 측이 자금 조달이나 우호 지분 확보가 더 쉬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