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노사정(노동계·경영계·정부) 대화를 보면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것 같습니다. 타고 올라가다가 끝에 도달하면 각자 튕기듯 갈 길을 가는 거죠. 그간 노사정 대화가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현 정부의 노동 개혁과 직결된 노사정 대화에 대해 국민 공론화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역대 정권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핵심 원인인 ‘과정 관리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노동 개혁은 의료 개혁과 함께 22대 총선 이후 정부가 가장 전면에 내세울 국정 방향이다.
허 원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노동연구원 노사관계최고지도자과정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노동 개혁은 현 정부뿐 아니라 모든 정부가 필요성을 잘 안다”며 “(하지만) 노사는 늘 입장이 팽팽하고 어렵게 특정 의제에 합의하더라도 해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허 원장은 윤석열 정부의 노사정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공익위원으로 참여했다. 1995년부터 노동연구원과 인연을 맺은 그는 고용 노동 전문가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사회보장위원회에도 참여해 복지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이달 4일 특별위원회 출범으로 본격화될 경사노위가 다룰 의제는 노사와 국민 생활에 직결되는 임금, 임금 불평등을 만든 노동시장 이중구조, 국가 미래의 문제인 저출생과 고령화(계속고용) 등 난제가 수두룩하다.
허 원장은 “전 정부는 의욕이 높고 문제의식도 좋았는데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처럼 노동시장 측면에서 부적절한 접근법을 폈다”며 “현 정부는 큰 틀을 만들고 정책적으로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이제 개혁은 성공 경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허 원장의 지론은 노사정 대화가 역대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노사정 대화를 통해 만들려던 새로운 노사 관계가 막히자 노동법 개정안을 강행했다. 이는 노동계의 총파업을 불러왔다. 역설적으로 다음 정부인 김대중 정부에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정리 해고와 근로자 파견제가 도입됐다. 박근혜 정부도 노사정 대화를 통해 2015년 9월 15일 극적인 대타협까지 이뤘지만 당시 정부가 이른바 양대 지침(저성과자 일반 해고, 취업 규칙 변경 요건 완화)을 추진하면서 개혁의 실패를 맛봤다.
허 원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합의를 이뤄 놓고 아무것도 못 한 것은 정부가 굉장히 주도적이었고 너무 성급했기 때문”이라며 “노사가 대립적인 관계에 머물러 하는 노사정 대화는 서로의 명분으로만 작동한다”고 우려했다. 이미 과거 실패의 경험을 겪은 노사정 대화 주체의 적극적 태도를 이끌어내는 게 일차 과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사정 대화에 참여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정책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허 원장은 노사정 대화에 참여하는 ‘안의 목소리’ 못지않게 ‘밖의 목소리’를 다시 대화 안으로 모으는 역할에도 주력할 방침이다. 정권마다 주어진 숙제처럼 여겨진 노동 개혁의 한계를 벗어나 ‘국민 모두의 노사정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허 원장은 “대화는 알맹이가 빠진 합의문을 만들거나 각자 의견을 일방적으로 내놓는 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국민이 노동 개혁이 지금 왜 필요한지 알고 노동계와 경영계 각각의 해법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 (이런 노력은) 현 정부에서 안 끝나도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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