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寫經)’은 부처님 말씀인 불경을 한글자 한글자 정성껏 베껴 쓰는 일을 말한다. 사경이라는 작업은 국내에 불교가 들어온 삼국 시대에 시작됐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대부분 고려 시대의 작품이다. 특히 고려는 국가 기관인 사경원을 통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고려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핵심 축인 ‘사경’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 3점, 보물 3점을 포함한 소장품 총 44건 64점을 상설전시실의 중·근세관에서 새롭게 선보인다고 16일 밝혔다. 특히 고려실에서는 고려 사경 4점을 배치해 당시의 불교문화를 소개한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기증한 국보 ‘감지은니 불공견색신변진언경’(紺紙銀泥 不空?索紳變眞言經), ‘감지은니 묘법연화경’(紺紙銀泥 妙法蓮華經),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紺紙金泥 大方廣佛華嚴經) 등 3점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은 2021년 기증받은 이후 처음 공개하는 작품이다.
‘감지은니 불공견색신변진언경’은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대장경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사경 사업을 왕명으로 추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근거가 되는 충렬왕의 발원 글귀가 마지막 부분에 쓰여 있다. ‘감지은니 묘법연화경’은 금니와 은니 화려하게 꾸미는 고려사경의 표지 형식을 잘 보여준다. 중앙에‘묘법연화경 권제7’이라고 쓴 제목을 배치하고 배경에 보상화문과 당초문을 가득 그려 넣어 장엄하는 방식이다.
국보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에서는 사경을 더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엄하는 방법으로서 변상도(變相圖)의 사례를 볼 수 있다. 이 사경의 변상도는 코끼리를 탄 제석천이 군사들을 이끌고 아수라(악신)의 군대를 쳐부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공덕이 제석천 군대의 힘보다 훨씬 크다는 의미가 담겼다.
또 조선실에서는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을 통해 조선의 명나라와의 문화교류 모습을, ‘국서누선도(國書樓船圖)’를 통해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 재개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보물로 지정된 ‘봉사조선창화시권’은 1450년(세종 32)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예겸과 집현전 학자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가 주고받은 시를 모은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이 직접 쓴 글씨를 볼 수 있으며, 조선과 명나라 지식인 사이에 이루어진 문화교류의 높은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국서누선도’는 조선 왕의 국서를 가지고 간 통신사 일행이 오사카 인근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제공한 배로 바꾸어 타고 이동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가 통신사 파견을 계기로 재개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밖에 국보로 지정된 ‘초조본 현양성교론(初雕本 顯揚聖敎論)’과 보물로 지정된 ‘청구관해방총도(靑丘關海防摠圖)’, ‘조숭 고신왕지(趙崇 告身王旨)’도 오랜만에 선보인다.
‘초조본 현양성교론’은 우리 역사 최초의 목판인쇄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으로 전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초조대장경의 품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청구관해방총도’는 18세기 후반의 국경지역 전체를 그린 대형 군사지도이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군사시설을 자세히 묘사하여 당시의 북방 방어 체계를 엿볼 수 있다.
‘조숭 고신왕지’는 조선 개국 직후 조숭에게 수여한 관리 임명장이다. 조선시대 관리 임명장은 보통 ‘교지(敎旨)’라고 한 것과 달리 이 임명장은 고려 때부터 쓰던‘왕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조선 초기의 관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밖에 대한제국실에는 근대식 교과서인 ‘산술신서’, ‘물리학초보’를 포함한 다채로운 근대 문물 관련 전시품이 소개된다. 이번에 교체한 전시품들은 9월 말까지 상설전시실 중근세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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