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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 무너진 사회주의…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 직면하다

■붉은 인간의 최후(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이야기장수 펴냄)

노벨문학상 작가 알렉시예비치

20년간 1000여명 직접 인터뷰

쉴새없이 군수물자 만들던 공장

사회주의 붕괴후 가전제품 제조

빈부격차 커지면서 인간에 혐오

소비에트인의 혼란·소외감 담아

1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제2차 세계대전 기념 단지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노획한 서방 군사 장비를 전시회가 열린 가운데 모스크바 시민들이 이를 관람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돈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폭발과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어요.”

영화 ‘굿바이 레닌(2003)’에서 주인공 ‘알렉스’의 어머니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다. 그녀는 독일 통일 직전 혼수상태로 쓰러진다.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에서는 빠르게 자본주의의 물결이 불어 닥친다. 글로벌 프랜차이즈 버거킹의 일자리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누구나 스웨덴 가구 회사인 이케아의 빌리 책장과 스트란드몬 1인용 의자로 집안을 꾸민다. 쇼윈도를 빛내고 매대를 가득 채우는 제품들 중 더 이상 동독의 제품은 없다. 깨어난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봐 어머니가 좋아하던 동독산 피클 용기와 포장지를 구해 서독산 피클로 채우는 아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집 밖으로 나온 어머니가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영화 굿바이레닌 갈무리


영화 속에서 혼수상태로 표현한 공산주의자 어머니는 사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흐름에 맞닥뜨리면서 보인 방어기제를 형상화했다. 어린 시절 알렉스의 우상이었던 우주인 ‘지그문트 얀’은 이제 택시기사로 일한다. 그에게 달 표면을 걷던 시간은 아득히 멀어진 옛 일이 됐다. 옛 소비에트인 역시 누구보다 큰 충격을 겪었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붉은 인간의 최후(2013)’에서 소련(옛 러시아)의 붕괴 후 소비에트인이 겪은 혼란을 이들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담아낸다. “아버지는 군수공장 설계국에서 미사일 연구 담당으로 일했고 학위도 두 개나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공장에서는 미사일 대신에 세탁기와 진공청소기를 찍어내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구조조정으로 해고됐고요.”

이 책은 알렉시예비치 작가가 쓴 ‘붉은 인간’ 시리즈 5부작 중 마지막 편으로,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했다. 원제는 ‘세컨드핸드 타임(Secondhand Time: The Last of the Soviets)’이지만 출판사 이야기장수에서 부제의 뜻을 더 살려서 새롭게 제목을 정했다. 특히 표지의 붉은 배경에 길게 그리워진 그림자는 제목 이상으로 강렬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목소리 소설’의 대가인 알렉시예비치 작가는 소련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대부터 20년 간 1000여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의 목소리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과거와 현재가 빚는 혼란과 뒤처져 있다는 소외감이다. 소련 시절 엔지니어들이 130루블씩 받을 때 보일러실에서 일하던 청소부는 90루블을 받았다. 더 많이 벌어도 살 수 있는 더 좋은 음식이 없었기 때문에 더 벌 이유도 없었고 사상과 책이 더 중요했다. 부엌에서 커피와 보드카를 마시며 ‘내적 망명’을 도모하던 이들 앞에 자본주의의 봇물이 터지고 만다. 90루블의 가치는 10달러 정도로 곤두박질 쳤다. 사방에서 외치는 ‘부자되세요’ ‘부를 축적하세요’ 목소리에 압박을 받는다. 순진한 소비에트인이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때 석유, 천연가스 등 국부는 소수의 재벌에게 집중돼 빈부 격차는 빠르게 사회를 잠식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씁쓸해 하는 부분은 돈이 대체하면서 사라진 것들이다. “소련의 가치는 어디로 갔나요. 수중에 몇백만 루블도 없고 벤츠도 타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혐오가 그 가치인가요. 사람들은 뭔가 숭고한 것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오늘 못 산 물건을 떠올리며 잠드는 판국입니다.”

이 소외감 속에서 이들이 집단으로 공유하는 것은 ‘고통의 언어’다.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감정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작가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도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내포될 때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고 언급한다. 말할 때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벨라루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는 우크라이나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소비에트인이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동질성은 수많은 이들이 마음을 여는 계기가 돼 크렘린궁에서 일하던 이들까지도 인터뷰 대상으로 확보하게 됐다.

책을 덮으면 말로 나온 언어들보다 그 사이에 숨어있는 말 줄임표들이 강렬히 남는다. 물론 이들이 감시와 도청, 배급제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시절 자신들에게는 공통의 적이 있었다는 동질 의식이 있었다는 게 다를 뿐. 이제 이들은 여러 적들과 싸우고 있다. 타인과의 비교 의식, 빠르게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열패감, 앞으로도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까지도.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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