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가운데 세계 각국이 반도체 산업에 쏟는 금액만 3800억 달러(약 52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국과 중국은 천문학적 보조금과 지원책을 무기로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유럽은 물론 아시아 주요국도 반도체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2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전 세계 각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배정한 금액이 총 38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연합(EU) 중심의 서방 동맹이 반도체 기업에 지급하는 직접 보조금만 810억 달러에 달한다. 블룸버그는 “(반도체 보조금 경쟁이) 전선을 넓히고 있다”며 “첨단기술 경쟁이 향후 세계 경제 구도를 결정할 중대한 전환점에 이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나라는 미국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발효한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390억 달러의 생산 보조금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표적으로 마이크론테크놀로지(61억 달러), 인텔(85억 달러), 대만 TSMC(66억 달러), 한국 삼성전자(64억 달러) 등이 보조금을 받았다. 이들 기업을 포함해 미국이 지금까지 자국 내 생산 시설을 투자한 기업에 할당한 보조금은 330억 달러로, 당초 계획한 규모의 84%가량을 이미 배정했다. 미국에 투자한 반도체 업체에는 750억 달러의 저리 대출과 최대 25%의 세액공제 혜택도 주어진다. 이를 통해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대만·한국 등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반도체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구상이다.
중국 역시 미국과의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대규모 보조금을 조성하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반도체 부문에 142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할 것으로 추산된다. 대(對)중국 기술 장벽을 높이고 있는 서방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은 이른바 ‘빅펀드’를 통해 반도체 및 장비 국산화에 나섰다. 현재 준비 중인 3기 빅펀드는 역대 최대인 270억 달러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조성된 1·2기 빅펀드를 통해 마련된 450억 달러 기금은 이미 투입이 완료됐다. 중국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2022~2026년 총 44개의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가동할 예정인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다.
유럽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와 중동의 신흥국들도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EU는 역내 반도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463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반도체 생산 역량을 증대하기 위한 반도체법 시행에 들어갔다. 반도체법은 현재 약 10%인 EU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두 배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반도체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반도체 매출을 현재의 세 배 수준인 963억 달러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도체 부문 지원을 위해 조성된 253억 달러의 기금 가운데 167억 달러가 TSMC 구마모토 공장과 라피더스의 홋카이도 공장 등에 할당됐다. 인도 역시 후발 주자인 만큼 자국 반도체 산업 부흥을 위한 다양한 우대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인도 타타그룹은 정부가 2월 마련한 10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최초의 상업용 반도체 제조 시설을 건설한다. 블룸버그는 “보조금 경쟁이 미국과 유럽·아시아의 동맹 사이에서도 심화하는 모습”이라며 “세계 주요국이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 등 첨단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반도체 수요를 가져오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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