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이 기준금리를 내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밝히면서 통화정책을 둘러싼 정부와 한국은행 사이의 힘겨루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경기를 생각하는 정부와 물가 안정을 우선시하는 중앙은행의 기조가 맞부딪히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당국이 부동산 시장과 환율 움직임을 염두에 두면서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6일 “이미 상당 부분 금리 인하가 가능한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며 “통화정책에 영향을 주는 물가지표인 근원물가 상승률이 최근 안정되고 있고 다른 국가도 금리를 인하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통화정책을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에너지를 뺀 5월 소비자 근원물가는 전년 대비 2% 오르면서 인플레이션 타깃(2%)까지 내려왔다. 앞서 캐나다 중앙은행이 주요 7개국(G7) 중 처음으로 금리를 기존 5.00%에서 4.75%로 내렸고 유럽중앙은행(ECB)도 4.50%에서 4.25%로 0.25%포인트 낮췄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은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면서도 “금리를 내리면 좋긴 할 것”이라고 전했다. 기준금리를 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7월과 8월, 10월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는 미국보다 앞선 7~8월에 한은이 금리를 내리기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영업자 지원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연착륙을 위해서다. 현재 정부는 소상공인을 위한 추가 대책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담기로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도소매 업종 고용이 월평균 3만 5000개가량씩 줄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영업자 금융 지원과 함께 경쟁력이 낮거나 이미 폐업한 자영업자들이 임금근로자로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담을 예정이다. 성 실장도 “실질적 금리 인하가 이뤄질 경우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한 내수 경제 회복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질서 있는 PF 구조조정을 원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지금쯤 금리가 내려가야 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는 “고물가와 내수가 부진한 상황에서 자영업자 부채도 계속 늘고 있다”며 “PF 부실 처리는 금리가 높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의 입장은 다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12일 창립 제74주년 기념사에서 “완화 기조로의 섣부른 선회 이후 인플레이션이 불안해져 다시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 감수해야 할 정책 비용은 훨씬 더 클 것”이라며 “물가가 목표 수준(2%)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현재의 통화 긴축 기조를 충분히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18일 ‘물가 안정 목표 운영 상황 점검’과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열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도 기존 입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며칠 만에 한은의 정책 방향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근원물가가 2%를 찍었다고 해도 통화 당국 입장에서는 이 같은 기조가 지속하는지 최소 3달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다시 뛰고 있는 데다 물가와 환율도 변수다. 5월 농산물 물가는 19.0%나 올랐고 석유류 상승률(3.1%)은 지난해 1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5월 가계대출은 주택 거래 증가와 함께 6조 원이나 불었다. 광의통화(M2)만 해도 4월 평균 잔액 기준 4013조 원으로 처음으로 4000조 원을 돌파했다.
성장률 전망이 0%대인 유럽과 달리 한국은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1.3%를 기록해 금리 인하 명분이 약하다는 측면도 있다. 대통령실이 하반기에 경기가 양호한 흐름을 탈 것이라고 한 것 자체가 선제적 금리 인하와 모순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가 더 벌어지면 금리 격차에 따른 고환율과 외국인 자금 이탈이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분석 역시 끊이지 않는다. 조장옥 서강대 명예교수는 “미국과 금리 차가 나는 상황에서 한은이 금리를 (먼저)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시장에 혼란을 주는 발언은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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