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비급여 진료가 실손의료보험의 보장 대상에서 제외돼 국민의 의료선택권과 한의진료 접근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초고령화 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한의 진료에 대한 수요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올해 말 출시될 5세대 실손보험의 보장 범위에 한의 비급여가 포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은용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토론회에서 '치료목적의 한의 비급여 실손의료보험 보장 필요성'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이 같이 밝혔다. 이날 토론회는 국회 민병덕·이수진·이강일·장종태 의원이 공동주최하고 소비자주권시민회의, 대한한의사협회가 공동주관했다.
실손의료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부분을 보장함으로써 사실상 국민 건강의 사적 안전망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민 4000만 명 이상이 가입해 '제2의 국민건강보험'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표준약관 제정과 네 차례에 걸친 세대 전환 과정에서 보장성이 축소되며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특히 한의계에서는 2009년 10월 표준약관 제정을 통해 한의 비급여가 보장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국민의 진 선택권과 한의 진료 접근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2014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치료목적이 명확한 한의 비급여에 대해 실손의료보험 보장범위에 포함해야 한다’고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에 권고했음에도 10년 넘게 시정되지 않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의학적 근거와 국민 수요가 명확한 치료목적 한의 비급여가 실손보험에서 완전히 배제되며 의료시장의 왜곡과 불균형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했다. 2014년 1318만 명에 달하던 한의의료기관 실수진자가 2023년 1113만 명으로 급감한 배경이 2009년 실손보험 표준약관 제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세대 초기 실손보험 가입자는 의료기관에서 도수치료, 체외충격파, 기타 비급여 치료를 전부 받았을 때 발생하는 총 진료비 33만 원 중 실손 보장액이 29만 원에 달해 4만 원만 부담하면 된다. 반면 한의의료기관에서 첩약과 물리요법, 약침술 등의 비급여 진료를 받으면 실손보험에 가입돼 있더라도 보장이 전혀 안되기 때문에 총 진료비 33만 원을 환자가 전액 부담하는 상황이다. 이 교수는 이 점을 들어 "실손보험 가입은 의료서비스의 상대가격을 낮추기 때문에 환자로 하여금 의료이용의 경제적 제약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나타낸다"며 "보험사들이 의과의 상해비급여, 질병비급여, 3대비급여를 특별약관까지 만들어 보장하고 있는 반면 비급여 한방치료는 모두 제외하고 있어 형평성 문제가 심각하다"고 비판했다. 2009년 실손보험 표준약관 제정 당시 한의 비급여 보장이 제외된 이유로 표준화 미비, 손해율 불확실성, 도덕적 해이 우려 등이 제기됐지만 그간 한의학 표준임상진료지침 77개가 개발 완료됐고,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 등이 시행되며 상황이 달라졌다는 주장이다. 특히 4세대 실손보험부터는 비급여 이용량에 따라 보험료를 할증하거나 할인하는 구조가 도입돼, 과잉진료 우려에 대한 대응 장치도 마련됐다고 역설했다. 치료 목적의 한의 비급여 진료를 실손보험으로 보장하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크게 완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체관계인 의과 비급여 진료가 줄면서 오히려 실손의료보험의 손해율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보험업계는 한의표준임상지침의 신뢰성 논란과 도덕적 해이가 우려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이형걸 손해보험협회 장기보험부장은 “자동차보험 진료비가 최근 10년새 80% 증가했는데 구성을 살펴보면 한방진료비가 2700억 원에서 1.5조로 5.5배 증가했고 한방을 제외한 의과의 경우 1.2조에서 1.1조 원으로 감소했다"며 “자동차보험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한의 과잉진료를 계속 경험하고 있는 입장에선 한의 비급여를 보장범위로 포함시키는 데 대해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김희경 생명보험협회 보험계약관리부장도 "한방 비급여 진료는 진료 범위와 시술 횟수 제한이 명확하지 않아 과잉진료 및 청구 남용의 우려가 크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라며 "진료비 단가가 비교적 낮지만 장기적·반복적 치료가 빈번하다보니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가시적인 장치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5세대 실손보험 개편 과정에서 한의계와 보험업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겠다는 입장이다.
윤성찬 대한한의사협회장은 "문제가 있으면 이를 방어할 방안을 찾아야지, 제도 진입을 막는 게 과연 국민을 위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느냐"며 "국민의 건강권 보장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실손보험 제도의 지속 가능성과 공정한 보장 원칙을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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